나답게 세상과 연결되기
내가 말하는 고독은, 관계를 끊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가 되자는 것이 아니다. 고독은 결국 세상과 연결되기 위함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답게 세상과 연결되기 위함이다. <정신의 삶:사유>에서 한나 아렌트가 한 문장으로 잘 표현했다.
“저잣거리를 그렇게 사랑했던 소크라테스도 집으로 가야만 했으며, 또 하나의 동료를 만나기 위해 혼자 고독 속에 있을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동료'란 내가 얘기하고 있는 ‘내면아이' 같은 존재다. 소크라테스는 집에 박혀 고독 속에만 있었던 게 아니며, 그렇다고 저잣거리에서 대화만 했던 것도 아니다. 양쪽 세계가 적절히 배합되고 반복되었다. 집에 들어가선 저잣거리에서 나눴던 대화들을 곱씹어 보고, 생각을 정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이 되면 다시 저잣거리로 나가 세상과 교류했다. 만약 소크라테스에게 고독이 없었다면, 사람들에게 통찰력 있는 질문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고독의 역할이다. 소크라테스가 매일 집으로 들어가야 했듯이 우리도 매일 고독으로 들어가고, 다음 날 다시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고독하지 못한 사람의 정신이 피로에 절어있는 것은, 집에 들어가서 안정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들어가기 두려워 밖에 붙들려 있다가 다음 날 바로 출근한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정신은 해소되지 않은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자신만의 생각을 준비하지 못하고, 세상과 지속적으로 부딪히기만 하는 건 위험하다. 자신의 가치를 제공하지도 못하고. 외부의 가치를 받아들이지도 못한다. 소로는 <월든>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교 모임은 일반적으로 말해 너무 천박하다. 우리는 너무 짧은 간격으로 만나고 그래서 상대방에게 어떤 새로운 가치를 제공할 시간이 없다. (...) 우리는 복잡하게 살고 상대방을 방해하며 서로에게 걸려 넘어진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린다.”
여기서 ‘상대방'이라는 존재를 세상 자체로 생각해 보자. 우리는 생각할 시간 없이 세상과 너무 자주 만나기 때문에, 세상에 어떠한 가치도 제공하지 못한다. 호기심 어린눈을 가지지 못해서 지루함을 느끼고 세상의 가치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소로가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잃어버린다고 했듯이,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을 잃어버리고 있다.
억지로 하는 일, 억지로 맺는 관계, 억지웃음과 같은 가면 뒤에 숨는 거짓된 삶이 아닌, 나에게 떳떳한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 고독은 필요하다. 진실된 삶을 살려면 자신이 무엇을 욕구하는지 알아야 한다.
사람마다 ‘욕구'와 ‘좋음'의 기준은 다르다. 자신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의 열쇠는 내면에 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외부의 욕구가 자신의 욕구인 줄 알고 살아간다. 따져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목표는 모이고 경쟁은 치열해진다. 누가 봐도 성공한 직장에 다니려고 한다. 그렇게 자신이 진정 원하는지도 모르는 경쟁에 청춘을 갈아 넣는다. 행복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35살까지 연봉 얼마!’라는 식의 목표를 잡는다. 돈은 행복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한데, 돈 자체가 목적이 되어 주객전도가 돼버렸다. 자신의 내면을 보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그만큼 한국에 다양성이 늘어날 것이다.
고독할수록 이기적이 아닌 이타적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기적인 사람은 오히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서 그렇다. 자기 자체로 온전할 수 없다 보니 돈과 지위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원하며, 베푸는 것을 아까워한다. 돈을 쓰는 것은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장하려면 자신의 몫을 어떻게든 더 늘려야 한다. 남의 상황 따위는 안중에 없다. 반면 내면아이와 유대감이 있는 사람은 자체로 온전하다. 돈과 물질적인 것들이 자아를 이루지 않는다. 그저 수단일 뿐이며 욕심부리지 않는다. 마음에도 여유가 생겨 얻은 것을 나누고 싶어 하고 거기서 행복을 느낀다. 삶의 주도권이 자신의 손에 있으며, 시간을 어디에 배분할지 결정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가치 있는 것에 시간을 쓴다.
내가 인문학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보통 인문학은 나이가 들어 여유 있을 때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젊을 때는 돈을 바짝 벌어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여기에 대해서 생각을 해봤고,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 번째로는 평생 그렇게 살아오던 사람이 나이 들어서는 인문학을 하긴 할는지에 관한 의문이었다. 두 번째로는 내가 만약 운이 좋아 말년에 인생의 의미를 깨달았다고 해도, 너무 슬플 것 같았다. “아! 이것을 이제서야 알았단 말인가! 좀 더 일찍이 알았다면, 내 청춘을 그렇게 허비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게 너무도 두려웠다. 그래서 지금 젊은 시기의 시간을 빌려 인문학을 하는 것이다.
언젠가 클럽장님과의 산책 중 인문학을 미루는 삶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클럽장님은 인문학이 명사가 아닌 동사라고 했다. 삶과 계속 함께 가야 하고, 인문학을 삶에 녹여내야 한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일찍이 접하면 좋은 것이다. 또한 인문학을 ‘인간에 대한 물음’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결국 ‘나에 대한 물음’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의 선조들은 평생을 걸쳐 했던 질문들을 책에 남겨놨다. 책들은 나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는 스승이며, 그렇기에 나를 고독하게 만들었다.
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젊음은 젊은이에게 주기 너무 아깝다”라는 말을 했다. 나는 나의 젊음이 아깝지 않길 바랐다. 농도 짙게 삶을 빨아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고독하기로 결심했다.
세상이 나를 갈라놓을지라도 나는 나를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