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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Mar 10. 2024

좀 지나갑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어디서 들어봤다고 아무 데나 막 써먹는 말.


위로랍시고 건네는 말 중에 가장 무책임한 말이다. 지나갈 시간이니 견디고 버티라고 말한다. 방법도, 대안도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밖에 도리가 없다고 던지는 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꼭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정말 강한 말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버지의 장례식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대학에 다니는 오빠와 연락이 닿질 않았다.

상주가 오지 않으니, 상복을 입을 수 없단다.

피를 쏟은 아버지를 일으키느라 내가 입고 있던 아이스진과 하얀색 반소매 티에는 혈흔이 가득했다.


흡사 살인자의 행색이다.


자정이 넘으면 안 된다는데 2시간을 남겨두고 장례식장 주차장으로 봉고차 한 대가 들어왔다. 오빠 친구들이 운전해 함께 온 것이다.

오빠가 그제야 영정사진 앞에 무릎을 털썩 꿇는다.


거실 바닥과 벽, 주방 싱크대까지 피로 가득한 집에서 아빠를 발견하고 상복을 입기까지 내가 기억하는 7시간이다.


피가 묻은 옷 그대로,

상복을 갈아입고서도 그대로,

남의 일 같은 광경을 무심코 바라보고 섰다.

누군가 내게 체중을 실어 눈물을 흘리면 그제야 무엇을 하고 있는지 퍼뜩 정신을 차린다.

24시간, 3일이 지나갔다. 죽도록 고통스러운 1분 1초인데 죽지 않고 다음 날 용케 눈을 뜬다.


3명이 된 가족이 장례를 마치고 현관문을 들어섰다.

지나치게 조용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소 그대로였다. 거실 바닥에 덩어리째 응고됐던 핏자국도 없었고, 씻으려고 물을 틀어 핏물이 흥건했던 주방 싱크대도 깨끗했다.

장례 후 문을 열고 들어설 우리 가족을 위해 이웃 주민들이 미리 청소를 해놓은 것이다.

변한 거 하나 없이 잡동사니로 가득한 낡은 연립 그대로였다.


드디어 방에 누워 천장을 멀뚱히 쳐다봤다.

'내방이다. 이 시간이 오는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20년도 더 지났다.

죽을 것 같던 시간을 기억하며 그 힘으로 산다. 더 힘든 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알잖아, 겪어봐서.

지옥 같던 시간도 지나가지 않던가. 견디지 못할 일은 없다. 언제 그랬냐는 듯 방에 누워있는 시간은 반드시 온다.


아빠가 피를 쏟은 만큼 내 몸에 피가 다 빠져나가는 고통을 겪으면서 얻은 교훈이다.




다음 주 마라톤대회에 참가한다. 정말 딱 한 시간만 후다닥 뛰고 오면 된다.

그런데도 준비하는 동안 몇 번이고 장례식장에 서있던 나를 마주했다. 슬픔을 견디는 고통과는 다르다.


그냥저냥 늘 뛰던 거리임에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느라 때아닌 혹사 중이다. 120을 준비하고 100을 뛰는 것과 80인 상태로 100을 뛰는 건 분명 차이가 난다.

완주해야 하는 거리가 정해져 있으니 편하게 거리를 조절해서 뛰면 안 된다. 페이스 탓에 천천히 뛸 수도 없어 매번 전력을 다한다. 하루쯤 쉴 수도 있지만 쉬고 나면 체력을 끌어올리는 게 더 힘들다.

술도 끊은 지 일주일이 넘었고, 밥도 하루 한 끼 반 정도로 양을 줄였다. 공복인 상태로 러닝을 하는데도 뛰고 나면 입맛이 없어 대충 때우고 만다. 허기가 지는데, 먹을 힘이 없다.

-누가 보면 풀코스 준비하는 줄.-


마의 구간이 두 군데 있다.

그 지점이 되면 정말이지 화가 치밀어 오른다. 잔뜩 짜증이나 단어도 아닌 말을 내지른다.


그러다 장례식장에 서있던 나를,

장례 후 내 방에 누워있던 나를 마주한다.


오도카니 서있는 내가,

초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던 내가,

저만치 앞장선다.

자기들만 따라오라고 끈을 묶어 끌어당긴다.

정신이 반쯤 나가 유체가 이탈한 게 틀림없다.


이 시간도 지나간다.

1킬로씩 줄어들다 보면 결승점이겠지.

또 아무렇지 않게 물을 마시며 페이스를 확인하겠지. 그리곤 뜨거운 물로 샤워하고 다시 찬물로 온몸의 열기를 식히며 목욕탕 소리를 내야지.


다리에 아이싱을 하고 전기장판을 틀어놓은 이불 속에 누워있는 시간이 다가온다.


"좀 지나갑시다."

꼴딱꼴딱 숨넘어가 죽겠는데 트랙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을 향해 짜증을 토해낸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도 좀 지나갑시다.

 

  



사진출처: Unsplash의 S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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