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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Apr 03. 2024

기분을 받아 낸 너에게


곱빼기,

짜장면 곱빼기를 당당하게 시켜 먹었다. 심지어 더 먹을 수도 있었지만, 저녁에 소주를 맛있게 먹기 위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공복에 흡수되는 소주가 나의 장기 길이를 알려주리라.


칼로리, 소화 따윈 중요치 않았다.

마라톤 대회에 다녀왔으니까!

드디어 전기장판을 틀어놓은 이불 속으로 몸을 욱여넣고 아이싱을 한다.


화가 풀리지 않아 시작한 러닝이다.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극한에 몰아넣어야 살 것 같았다. 흉부를 크게 벌려 숨을 들이켜야 호흡할 수 있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오롯이 호흡과 통증만으로 육체를 괴롭혔다. 폭염에도, 강추위에도 흐르는 땀이 바람에 날리도록 뛰었다. 기운이 없어 축 늘어지고 나서야 드디어 분노할 힘도, 독을 품을 기력도 사라졌다.


그러다 몸을 극도로 혹사하고 나서야 맞이하는 쾌락에 빠져버렸다. 몹시 더운 날 시원한 맥주 한잔을 마시기 위해 땀을 빼고 뛰는 것처럼 이상한 환희를 즐기게 된 것이다. 게다가 뛰고 나면 술을 마음껏 마셔도, 안주를 양껏 먹어도 죄책감이 들지 않았다. 그야말로 지상낙원이다.


마침 친구가 바람을 넣었다.

티셔츠를 두 장이나 준단다. 기록도 가질 수 있다고 하니 이게 뭐라고 소유욕이 생겨 덜컥 대회에 접수하고 말았다.


내 돈 내고 받는 수집품이 쏘아 올린 물욕의 대가.

감정 기복이 사춘기, 임산부, 갱년기 못지않았다. 뛰는 건 좋은데 스트레스를 받고, 통증이 있는데 쉬면 불안했다. 기분 좋게 뛰는 게 낙이었는데 급기야 입맛을 잃었다.


운동 좀 한다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운동 후 입맛이 도는 건, 딱 입맛이 돌 만큼만 운동했기 때문이다. 정말 힘들게 운동하고 나면 입맛이 사라진다.-

혹사 후 누리던 극락의 세계가 사라졌다. 절망이다. 이러려고 뛴 게 아닌데.


잠깐만 후다닥 뛰고 오는 거야. 저녁에 매운 닭발에 소주 먹을 생각만 하면 돼. 한동안 뛰지도 않을 거고, 대회도 다시는 나가지 않을 거야.


선거에 출마하는 국회의원보다 다부진 다짐을 했다.



“뛰는 데 이어폰은 왜 끼는 거야?”

“템포 빠른 음악을 들어야 힘이 나니까. 그리고 런저씨가 음성으로 페이스를 알려주니까 듣고 속도를 조절해야지."

“사람들 발 구르는 소리를 듣는 거야. 응원하는 사람들 소리를 들으며 대회를 즐겨."


부부 사이에 운전은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고 했다. 뛰는데 호흡까지 코치하는 친구가 운전을 훈수 두는 남편보다 밉다.

“힘들어 죽겠는데 말 좀 시키지 마.”


결승선을 앞두고 코너를 도는데 친구가 또 말을 건다.

"지금 조금만 더 높이면 1시간 안쪽으로 끊어."

"싫어."


빨리 뛰는 게 목표도 아니고, 순위 때문에 뛰는 것도 아니다. 힘들게 속도를 높이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날 밤 바로 후회했다. SNS 피드에 같은 마라톤에 참여한 박재범과 임시완 사진이 도배되었기 때문이다. '조금 빨리 뛸걸.' 코앞에서 놓친 것도 아니지만 억울했다.-


결승선을 통과하고 나니 눈앞에 놀이동산이 펼쳐졌다. 어린이날도, 운동회도 아닌데 모두가 좋은 것을 손에 막 쥐여 준다.

아디다스여, 아끼지 말고 뿌리소서. 포카리스웨트여, 하늘만큼 파란 피가 돌게 양껏 나눠주소서.


사람들에게 이쁨받는 강아지가 되어 너도나도 나눠주는 간식을 받아 챙긴다. 1분 전만 해도 말도 나오지 않더니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잔뜩 신이 났다. 어린이날도 이런 어린이날이 없다.


메달과 함께 물, 에너지 음료, 초코파이 한 보따리를 받아 들고 그제야 바닥에 앉아 운동화를 벗었다.

충만해지는 건 신앙만이 아니다. 주위에 젊은 에너지가 가득하다. '건강, 건강, 열정, 열정' 단어가 부유물처럼 떠다닌다.

아, 좋다. 이러려고 뛰었지.


"페이스는?"

1시간에서 1분이 넘어갔다.

조여진 운동화 끈을 풀자, 비로소 피가 돌며 십여 분 전 친구의 목소리가 뇌에 전달된다.

-조금만 더 높이면 1시간 안쪽으로 끊어.-


"막판에 뛸걸 그랬지? 페이스가 좀 아쉽네. 그치?"


운전을 가르치다 감정이 상한 부부가 끝내 말이 없어지듯 침묵의 순간이다.




11월, JTBC 서울마라톤 참가 신청을 했다.

다시 마라톤 대회를 접수하면 인간이 아니라더니 술 마신 다음날 금주를 다짐하듯 부질없는 말을 해버린 셈이다.


친구의 말이 또 이명처럼 들린다.

"풀코스를 신청했어야지."

후회할지도 모른다. 11월이면 풀코스 대비가 가능하니까.


마라톤 신청을 하던 날, 현관에 놓인 운동화에 메달을 살포시 걸어줬다. 나의 동지.

다음 대회에는 운동화 수명이 다 돼 다른 운동화와 함께해야 할지도 모른다.


화가 나 쾅쾅대는 발바닥을, 기분이 좋아 살포시 내딛는 발걸음을 오롯이 견디며 대회를 함께 해 준 운동화.


더는 기분으로 뛰지 않아도 되는데 기분대로만 대하다가 보내주는 것 같아 못내 미안하다. 마치 가난했던 시절 고생만 한 아내가 살만해지니 병에 걸려 미안하고 속상한 마음.


나를 받아 내느라 고생했어, 온러닝 클라우드몬스터.

처음을 함께 해 줘서 고마워, 나의 운동화.


러너들이 주로 신는 휘황찬란한 브랜드 속에서 낯도 가리지 않고 대견해, 온러닝.

누가 뭐래도 내 발엔 딱 맞으면 됐지.




사진출처: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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