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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Apr 04. 2024

일고여덟 열


데릭, 한국은 아홉수라는 게 있어.


옛 애인에게 자냐고 물어보듯 가끔 과거 영어 선생님에게 혼잣말을 하곤 한다.

크게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질문이 아직 생각나기 때문이다.


그날 토론 주제는 "내가 무서워하는 것 세 가지"였다.

캐나다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던져진 질문이다.


다른 대답은 기억나지 않지만, 숫자 9가 무섭다고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여전히 무서우니까.

그냥 무서운 게 아니라 공포로 느낄 정도로 두렵다.


나이, 연도에 숫자 9가 들어가기라도 하면 일 년 내내 그야말로 구석에서 발발 떠는 강아지 꼴이 되고 만다.

이번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다 그렇겠지만 가족과 관련된 일이 항상 두렵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훌훌 털어버려서 될 일이 아니다. 좌절하거나 심신이 무너지는 일이 생기곤 했다.

굵직하게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겨우 먹고살 만하던 집이 경제위기로 사지에 내몰리기도 했다. 온갖 구설에 휘말리거나 직장을 잃는 일도 있었다.


영어 선생님이 좋은 기억을 만들어 숫자를 이겨보라는 교과서 같은 조언을 했다. 그리고 한국 나이가 아닌 캐나다를 중심으로 시간을 다시 맞추라며 기발한 자신의 제안에 나보다 더 탄복한다. 영어가 짧아 속엣말을 다 못하고 입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That's a good idea."


-차라리 기도나 하라 그래. 경험이 정신을 지배할 때가 있어.-


이후에도 그가 농담 삼아 시계를 가리키면 나를 부르곤 했다.

"봐, 9야. 아무 일도 없지?"

또 영어 못해 미소 지으며 Yes만 외치는 한국인이 되어버린다.

"Yes, you are right."


1년을 채우지 못하고 29살에 귀국했다. 수많은 유학생이 외환위기를 견디지 못했다. 그에게 아홉수를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결국 9를 이기지 못했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데릭, 아홉수에 또 졌어.-




브런치에 로그인을 하면 한동안 숫자를 지켜본다. 구독자 수야 어쩔 수 없지만 발행 글 수를 보고 급하게 머리를 굴린다.

저장된 글이 몇 개나 되지?

마음이 조급하다. 플랫폼에 9가 오래 보이지 않게 글을 얼른 발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뿔싸. 나름 신념과 철학을 갖고 관리하는데도 뒤통수를 맞고 만다.

예고하고 찾아오면 규칙이지 어디 불안이겠는가.

몇 달 전, 공모전에 응모할 글을 골라 발행을 취소하였다. 행여 저작권으로 문제가 생길까 봐 선제 방어를 한 건데 글 하나를 거둬들이고 나니 총발행 글 수가 "9"가 되어버렸다.


젠장.

예감이 틀리지도 않지.

아니, 그래서 공모전에 떨어졌다고 말하는 건 아닌데 굳이 내 마음이 그렇다는 거다.


데릭, 원주민식 숫자 세는 방법은 다르다고 캐나다 문화라도 가르쳐 주겠니?

뭐라도 꿰맞춰 극복해 보게.




사진출처: Unsplash의 Nazym Jumadil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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