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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후 4시

너의 플라타너스

by 빌려온 고양이


정작 비바람에 휩쓸려 오즈에라도 떨어졌으면 하는 사람은 나였다. 비바람이 애먼 나뭇잎만 못살게 군다. 나뭇잎이 어련히 알아서 떨어질까.



모퉁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비를 피하는 사람과 마주쳤다.

'아저씨, 비 오는데 나무 아래에 있으면 위험해요.'


그제야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다칠까 봐 피하는 낙엽일 뿐이었는데 자세히 보니 플라타너스였구나.


그날도 플라타너스 아래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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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나를 사러 가던 길이었다. 어지간히 좋아하는 술이다. 우리나라에서 먹는 값이면 캐나다에서 세 병이나 살 수 있는데 안 마실 이유가 없다. 국지성 호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리퀴드 샵 마감 시간이 더 중요했다.


"캐나다 나무 스케일 봐라. 비 하나도 안 맞는다."

"사람들이 보면 동양인들 무식하다 그래. 누가 위험하게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하냐?"


30분 후, 그가 옴짝달싹 못 하는 우리를 데리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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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9시가 되면 식탁에 둘러앉아 팁으로 받은 동전과 지폐를 정리한다. 가늠할 수 없는 벌이로 영주권 딸 때까지 비자를 연장하려면 푼돈도 가릴 처지가 아니다.

"오늘 하루도 더러운데 잘 살았네."


박스째 쌓아놓은 버드와이저와 몰슨 캐네디언을 마시다가 각자 집으로 돌아가지만 하진이가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은 곧잘 자고 가곤 했다.

아내와 고등학생인 아들, 중학생 딸이 있었다.


"무슨 사이야?"

캐나다에 온 뒤로 한 달을 지켜보고 나서야 물었다.


"아빠 같은 사람이야."

"왜 같이 자?"

"아빠 같은 사람이니까."


"진짜 아빠가 아닌데, 같이 잘 수 있다고? 우리 낼모레 서른이야. 누가 봐도 이상해."


그는 식당, 마트, 펍에 물류를 납품했고 아내는 식당 주방에서 일했다. 사업에 실패하고 이민을 온 사람,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았다.

나이답지 않은 백발 머리가 잘 어울렸다. 웃는 표정 그대로 주름진 얼굴이라 누가 봐도 인상 좋은 중년이었다. 가족 보다 우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면 나는 뭐라고 불러야 하냐?"

"존."


우린 둘 다 아빠가 없다. 하진이가 병원에 실려 가야만 끝나던 아빠의 폭력은 이혼으로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동시에 연락과 돈이 끊겼다.


나는 누구도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돌아가신 아빠가 필요한 거지 아빠의 자리를 채워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의지하는 친구 같은 분이라고 했다. 아니다. 친구도 아빠라고 부르지 않는다.


하진이가 아빠라고 부르는 순간 하진이 주위가 일렁였다.


"하진아, 진짜 아빠가 아닌데 그러지 마."

"너는 몰라."

여기 사회가 다르다고 했다. 설명이 안 되는 미지의 세계처럼 말했다.

"야, 나도 아빠 없어. 뭘 몰라? 다른 정서는 뭔데? 너는 한국인 아니야?"

본질이 아닌데 국적이 전부인 것처럼 싸웠다.


그와 같이 있는 하진이는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문제를 짊어진 가장처럼 굴었다. 흡사 바람과 파도를 이겨내고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 못지않았다.


"한국에서도 다들 그렇게 살아. 네가 그렇게 안 살았나 보지."

"너는 몰라. 여기는 달라."


또, 또 그 소리.

한인 사회가 마법의 대륙인 오즈인 양했다. 같은 문화권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공간일 뿐이다. 또다시 한국 밖 세상을 나무 그늘 삼았다.

그가 하진이를 품어 달랜다.


여권이 무슨 색이면 이해할 수 있을까.

가장인 듯, 아이인 듯, 보호자인 듯….

가족같이 사랑하는 사이. 단어가 쪼개진다.

가족, 사랑하는 사이.


_

"위험하게 나무 아래에 있으면 어쩌냐, 이놈들아. 어차피 빈 병이 다 찼다, 아빠가 알아서 맥주로 바꿔다 줄 텐데."


아빠,

하진이 주위가 또 일렁인다. 피사체가 일그러진다. 공기가 얼음처럼 금이 간다. 왜곡되고 위태로운데 내 눈에만 보인다.

하진이가 갈구하는 아버지,

사업에 실패하고 가정에서 외면받는 가장이 결핍을 메우느라 찾는 자식.


서로 보호하는 것이 비 오는 날 플라타너스 아래 서 있는 것만큼이나 불완전하고 위험했다.


하진이가 비를 피하느라 손바닥 아래 고개를 쑤셔 넣고 차를 향해 뛰어간다.


'비 좀 맞으면 어떠니, 이제는 정신 잃을 때까지 맞을 일도 없는데.'

끝내 말을 삼켰다.

그냥 때 되면 떨어지는 나뭇잎이 되기로 했다.


하진이 눈에 찌그러진 피사체는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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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그 나무 아래, 그 비 아래 서 있다.

비를 피하는 게 옳은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단, 십수 년이 흘러 긴가민가한 관계를 털고 나서 그때 네게 하지 못했던 말을 해본다.


비 좀 맞으면 어떠니.

어차피 낙엽이 될 관계인데.




사진 출처: Unsplash의 Ellaina Hor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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