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오후 4시

벌써 20년

집회

by 빌려온 고양이


그 시절,

술만 먹으면 <브라운 아이드 소울> 노래와 <H의 잊었니>를 들어야 했다.

우린 끊임없이 연애를 했고 어김없이 이별 중이었다. 모든 노래 가사가 내 얘기 같았다.

정말이지 미친 듯이 사랑하고 아파했던 20대였다.


"노래 끄지 마. 다 죽어."


어제 헤어졌다는 친구 말에 약속이라도 한 듯 <벌써 일 년>의 첫 소절을 불러준다.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다음 소절부터는 가사의 속내와 다르게 조롱이 시작된다.

"그 생각만으로 벌써 일 년이."


"그러다 3년, 5년 혼자 사는 거야."


_

가수 한해와 개그맨 문세윤이 방송에서 <벌써 일 년>을 부르는 장면이 화제가 됐던 모양이다.


- 이 노래 제목이 뭔가요?-

게시물 댓글을 보고서야 세월을 알아챈다.

‘아, 모를 수도 있겠구나.’


그럴만한 세월이 흘렀다.

위로하듯 조롱하며 노래를 부르고 술을 먹던 우리는 지병이 있는 친구와 나를 제외하곤 모두 결혼한 지 오래다. 결혼하면 이성 친구는 연락하지 않는 게 예의라는 말에 암암리에 모임에서 열외가 되었고 자연스레 멀어졌다.


가열하게 공부했고 개처럼 놀던 기억이 대부분이지만 그나마 특별한 기억이라면 故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간 것이다. 지금만큼 정치에 관심이 있었다면 역동적으로 참여했을지 모르겠다. 당시에는 억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자 숫자라도 보태려는 심산으로 무턱대고 도로 위로 모였다. 무엇보다 신나게 즐기다가 맥주를 마시러 가는 게 놀이라고 느낄 만큼 젊었다.


그런데 무턱대고 했던 일이 역사에서 이렇게나 대단하게 오래 기억될지 미처 알지 못했다.


요 며칠 달라진 탄핵 집회를 보니 참 새삼스럽다. 흠집이 날까 봐 콘서트 때 말고는 모셔둔다는 응원봉을 누구나 할 것 없이 들고 나왔다. 가장 소중하고 밝은 빛을 들고 나왔다는 인터뷰가 심경을 대신한다.


감정에 솔직했고 푸르렀던 나의 시간과 다르진 않을 텐데 젊음이 서글프고 참 눈부시다.


노무현 대통령 이후로 20년이 지났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내가 나이가 들었을 뿐이다.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그런 생각으로 벌써 일 년이.

너와 만든 기념일마다 슬픔은 나를 찾아와.


화가 나서 덤벼보지만 변하지 않는 상황에 좌절한다. 그런 상황에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적응이 되면 어지간히 불합리한 일에도 무덤덤해진다.

일 년, 이년 내성이 생긴다.

그러다 서거일이 되면, 선거철이 되면, 기념일처럼 나를 찾아온다.


그날의 울분, 그날의 젊음이.


좋아서 갈구하는 연애도 아닌데 집회는 어찌 이리 변함없이 반복될까.


나이가 드니 내가 사랑했던 그 시절 노랫말도 정치가 되는구나.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