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왔다.
절기 앞에서도 기세등등하던 더위가 드디어 고개를 떨군다.
정말 몇 달간 찜통 속 만두로 살았다.
누가 만든 표현인지 <찜통 같은 더위>란 말은 치킨만큼 과학적이고 완벽하다.
방에서 한참 글을 쓰다 거실에 나오고서야 한기를 느낀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수족냉증인가. 시린 손이 반가워 온몸으로 체온을 재본다.
추운 게 맞네.
등 떠민 여름이라도 막상 간다니 미웠던 끝자락을 아주 살포시 잡아본다.
여름에만 보는 영화를 마지막으로 틀었다.
콜미바이유어네임.
- 햇살이 밝고 눈부시다. 온전히 몸을 내 맡긴다. 그늘 하나 없는 흙길을 걸어도 여름방학 낭만인 양 한껏 찬란하다.-
여름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사람처럼 영화 속 여름을 동경한다.
냉장고에 하나 남은 천도복숭아를 잘라 맥주 한잔을 마신다. 비 때문에 러닝을 못 했는데 복숭아와 맥주를 먹는 걸 보니 그동안 갈증이 나서 먹었던 게 아니구나.
이마를 '탁' 치는 깨달음이다.
더위에 달달 볶여 안중에도 없던 풋사과를 책으로 대신해 본다.
<여름의 끝>
끄트머리가 되니 어지간히 아쉽구나. 여름.
사진출처: 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장편소설,
번역 : 민은영, 출판: 한겨레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