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지만 살아있다.
숨겨진 내면아이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담담하게, 괜찮게, 어른답게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속수무책이다. 마치 내면아이와 게릴라 데이트를 하는 것만 같다. 주체할 수 없이 기쁜 날에는 멋대로 찾아와 하하호호 웃음을 터뜨리고,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거나 슬픔에 잠길 때는 ‘어른답지 못한’ 눈물샘이 멈출 줄 모른다. 엉엉 소리내어 울기도 거침없다. 이성적인 반응으로는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내면아이의 반응을 결코 억누를 수는 없다.
이제 알게 될 것이다. 내 안에 여전히 살아있는 내면아이를 살펴줘야 한다는 걸. 돌보아야 한다는 걸.
내면아이에 관한 이야기를 담담히 그린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는 수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명작으로 남은 작품이다. 극 속에서 주인공인 재열(조인성)은 환시를 통해 자신의 내면아이인 강우(도경수)와 만난다. 강우는 폭력과 학대를 일삼은 의붓아버지에게 상처입은 재열의 내면아이다.
어른이 된 재열의 삶에 불쑥불쑥 찾아오는 강우는 재열의 무의식 저 아래에 있는 감정과 생각을 여과없이 드러내는 존재다. 두렵고, 불안하고, 무섭고, 괴로운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이 성장하고자 발버둥친다. 재열과 강우는 뒷걸음질 치지 않고 서로를 똑바로 바라본다. 꿋꿋이 대면한다. 끊임없이 대화하고 소통하며 희노애락을 함께한다.
<괜찮아 사랑이야>는 재열을 통해 내면아이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성숙한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담담히 보여줬다. 과거의 아픔을 인정하면서도 그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현재’에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 자아가 통합되는 변화를 제시한 것이다.
이 드라마가 인기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은 외상에는 병적으로 집착하며 호들갑을 떨지만 마음의 병은 짊어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과 사랑을 되짚어보는 이야기”라는 소개글이 말해주고 있다. 감기처럼 재채기를 하거나, 목발을 짚고 거리를 힘겹게 다니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증상은 없지만, 내면아이가 지니고 있는 상처와 결핍은 살아있다. 재열과 강우가 조우하는 장면들마다 그 섬세한 감정의 역사들이 한 겹 두 겹씩 열렸다.
투사.
투사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열등감이나 공격성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인에게 원인을 돌리기 때문이다. 투사가 건강한 관계를 위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다. 가령 내면아이의 억압된 생각이나 충동이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면, 자신의 욕구를 상대방의 것으로 가담해 지각한다. 내담자가 아내에 대해 "그녀는 참 냉정해요"라고 얘기한다면, 실은 그 스스로가 냉정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만약 정신역동적 가족치료사라면 이 사례를 어떻게 다룰 수 있을까. 아마도 ‘감정정화’ 기법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또는 현재의 관계에서 겪고 있는 갈등의 뿌리를 발견하도록 자유연상을 유도할 수 있다. 무의식을 자유롭게 탐색하고, 어떤 가치와 규범들이 내면아이를 어떻게 구성하는지 살펴본다. 재열의 관점에서 보면 의붓아버지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건강하지 못한 소통이 상실과 좌절의 원인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누구나 의존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 다만 그것이 충분하게 채워지지 못할 경우도 있다. 이로 인해 정서적으로 굶주린 내면아이가 오래토록 삶 속에 나타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내면아이가 나타났다면 다음 3가지 방법을 실천해보자. 그동안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살펴보는 것. 마음의 소리를 무시하지 않고 온전히 받아들이기. 표현되었어야 할 감정을 늦게나마 표출하기. 내면아이를 치유하는 방법들이다.
존 브래드쇼는 이 뿐만 아니라 채워지지 못한 욕구의 상실을 애도하는 것이 치유의 시작점이라 일컬었다.
자신이 원하는 '욕구'들을 솔직하게 살펴보자. 그 욕구가 발현되는 것이 부모와의 관계에서든, 형제자매든, 친구든, 연인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주관적으로 그 욕구가 잘 채워지고 있는지도 생각해보자. 결국 핵심은 현재 맺고 있는 관계에서 충족되지 못한 욕구들의 근원을 따라가보는 것이다. 만약 충족되지 못했더라도 그 욕구를 인정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채워가도록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좋다.
여한없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보듬어주라. 어떤 감정과 생각이든 부정하지 말고 받아들여본다면, 우리의 에너지를 현재에 조금더 긍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욕구의 좌절이나 상실이 있었던 과거를 외면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과거에서 탈출하기 어렵다. 건강한 슬픔, 건강한 애도의 과정을 통해 내면아이와의 접촉을 이어가야 한다.
내면아이가 찾아오는 시기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특정 순간에, 분노, 슬픔, 좌절, 불안이 반복되는 '주기'가 돌아온다. 그때 내면아이가 어떻게 반응하고 싶어하는지 잘 살펴보면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속에서 결핍을 발견하고, 그 결핍을 건강한 방식으로 채우는 방법을 실천해본다면 어느덧 한뼘 성장한 내면아이와 자신을 마주하게 될 거다.
이 세상 모든 '내면아이'들이 충분히 이해받고 존중되기를 바란다. 빛처럼 빠른 일상 속에서, 아직 이름불리지 못한 수많은 내면아이들이 있을 것이다. 희미하게 들릴 지언정, 자신 안에서 울리고 있는 숨겨진 외침에 집중해보기를 권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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