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리스트는 물건이 아닌 나로부터.
나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내 공간들을 보면, ‘언젠가 쓸 것’, ‘언젠가는 쓸 수 있는 것’, ‘언젠가 쓰고 싶은 것’과 같이 과거를 담고 있거나 미래를 담고 있는 의미가 부여된 쓸떼없는 물건들이 수두룩하다. 가끔 나는 이것들을 버리고 정리하는 시기가 온다. 마음이 헛헛하거나 혹은 어떤 일들이 잘 풀리지 않을때 나는 정리를 한다. 그 날도 그랬다. 컴퓨터 책상에 앉아 컴퓨터 폴더들과 바탕화면을 정리하다가 먼지가 그새 뽀얗게 쌓인 책상을 보게되었고, 나는 서재며 수납장, 서랍 안 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의 한 시절을 갖다 버린 날이었다.
몇 년을 함께 한 물건들을 이리 쉽게 버리게 될 줄은 몰랐다. 어릴적 그렇게 많이 이사를 다녀도 자그마한 열쇠고리 하나까지 챙겨가던 편이어서 더욱 몰랐다. 마음이 헤픈 것이 사람에게만 헤픈 것이 아니어서, 내 마음에 들어 사들인 물건도 한참 쓰는 편이니 선물 받은 것은 하등 설명이 필요 없다. 로고가 지워지고 모서리가 헤져도 제구실만 한다면 내게는 새 물건과 다름이 없었다. 버리는 법을 배우기란 영 쉽지 않았다. 종량제 봉투는 제 시기에 잘 버리는 편이다. 다만, 종량제 봉투를 하나씩 내던지는 것과 쓰던 물건을 버리는 것은 확실히 다르게 와닿을 뿐이다. 쓰던 물건을 버리기란 여간 찝찝하고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버릴 물건들을 골라내며 생각이 많아졌다. 말이 잡동사니지, 내 과거의 파편들이었다. 서랍의 내용물들을 버리기란 내 흔적을 버리는 것과 같았다. 기억을 어떻게, 추억을 어떻게 그리 쉽게 버릴 수 있나, 하며 살아왔기에 더욱 예상치 못했던 행동이었다. 내가 저지르고 나서도.
기억은 미화되기 십상인 것에 반해 물건들은 그렇지 않다. 편지든 일기든 선물이든 손에 잡히는 기억의 물리적인 조각들은 내가 지나온 시절들을 마디로 나누어 온전히 보여주었다. 너 이때는 이랬어, 저 때는 저랬고. 이때는 좀 추했던 날들이 많네. 오랜만에 펼쳐본 어릴 적 일기장에 담겨있는 생각에 깔깔 웃기도 하고 마음에 흠칫 놀라기도 하는 것처럼, 물건들도 그렇게 내 과거를 보여주었다. 뒤엎은 서랍에서 나온 것들을 바닥에 흩트려 놓으니 내 옛날을 전시해 놓은 꼴이었다.
그 시절에 썼던 마음에 대한 예의를 이제야 버릴 수 있는 것도 한몫했을 테다. 어떤 심산으로 J의 팔을 베고 잤는지, 어떤 심정으로 H와의 여행을 거절했는지 지금은 면밀히 기억나지 않아도 당시의 마음들이 어여뻐서 소중히 대하던 것들이 있다. 다만 이유 모를 권태감이 들었던 그 토요일엔, 어쨌건 나는 여기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예쁜 것은 맞지만 더 귀엽고 소중한 것들을 담고 싶다는 욕구도 문득 치밀었을 뿐이다. 그래서 한밤 서울 대로변을 같이 걸었던 Y가 건네준 목걸이도 쉬이 버릴 수 있었다. 물리적인 파편 따위는 갑자기 무용하게만 느껴져서. 정말 그 시절의 너와 나에게 더는 미련이 없어져서. 어쩌면 권태감이 아니라 마음이 뜬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무 일정도 없어 느긋했던 한낮이 순식간에 지나간 토요일이었다. 3년 만의 대청소였다. 내다 버린 옷과 종이, 봉투들은 주말이 지나면 수거될 예정이다. 내 삶의 잉여를 버린 것인지 내 몫을 버린 것인지 조금은 헷갈렸지만, 그래도 내 몫은 챙길 만큼 다 챙긴 것 같아 적당히 후련했다. 먹잇감을 한입에 삼킨 뒤 오랫동안 소화하는 뱀처럼, 오랜 기간 서랍에 넣어둔 채 기억의 영양분을 힘껏 흡수한 것 같달까. 이별이 후회되는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앞으로 수집할 계절의 조각들은 어떤 모양일지, 어떤 서사로 전시될지 예측할 수 없지만, 아무렴 어떻겠는가 싶다. 서툴지만 잘 비우고 잘 담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지난 토요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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