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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무드 Feb 13. 2024

사회생활 15년 만에 사람 사귀는 법을 알았습니다.

선택적인 아웃사이더

나는 왜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할까?


요즘 들어 '나'라는 존재와 '나'를 사랑하는 방법, '나'를 활용하는 방법에 대해 부쩍 관심이 많다. 나는 도대체 어떤 사람 일까? '나'라는 사람은 크게 유년시절, 청년, 지금 현재의 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여기서 '이렇게'는 어떤 의미냐고 묻는다면, 아주 세부적이고 예민하고 다양하여 정확히 일목요연하게 정의할 수 없다.


그냥 두리뭉실 '나'라는 사람이라고 정의해 봐야겠다.

최근 2-3년간 나는 나 자신을 탐구하고 깊이 들여다보고 나를 줄곧 잘 사용해 왔다. 하지만, 최근 한 달간 나는 다시 과거의 나를 끄집어내어 별로인 나를 만들었다. 정확히는 내가 사회와 연결되어 있을 때 나 자신에 대해 별로인 점을 발견했다.



사회생활을 스무 살 때부터 했으니, 15년째다.

오늘 나는 15년 만에 사람 사귀는 방법을 알았다. 나를 키운 엄마와 할머니가 내게 늘 하던 말이 있다.


'너는 그 심통만 없애면 돼. 그럼 사람 사귀는 게 쉬울 거야.'


내게 이 말은 늘 숙제였다. 내가 언제 심통을 부렸다는 거지? 도대체 심통이 뭐야! 사람들은 왜 나를 피하지? 내 얼굴에 심통이라는 게 붙어있는 건가? 거울을 보고 암만 찾아봐도 심통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유년시절 왕따를 경험해 본 나는 사회생활도 그다지 썩 재밌지 않았다. 늘 긴장하고 살았어야 했고, 저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오늘 저 사람 표정은 왜 그러지? 말투는 왜 저런 걸까? 방금 나를 째려본 것 같은데, 아닌가? 나한테 기분 나쁜 일이 있었냐고 물어볼까? 아냐. 그냥 말을 말자. 신경 쓰지 말자. 혼자여도 괜찮아! 혼자는 아무거나 다 해도 되잖아! 굳이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애쓰지 말자!라고 치부해 버린 기간이 꽤나 길다. 이게 내가 세상과 사회를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최근 입사한 회사 8개월째다. 운이 좋았는지, 나랑 업무스타일도 같고, 성격면도 같은 회사 짝꿍을 만났다. 육아휴직이 끝나고 오랜만에 나와 잘 맞는 회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그 짝꿍과 몇몇의 회사 지인들이 회사 사정으로 인해 하나 둘 그만두기 시작했다. 마음이 허하다 못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나랑 문제가 있던 게 아니라 더더욱 그들을 놓치기 싫었다.


이후 새로운 사람들이 한꺼번에 입사했고, 나는 선택적 아웃사이더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친해져 봐야 도움이 될 게 없다고 생각하고 판단했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내가 나의 아이라면 내게 그렇게 하지 말고 사회에 잘 적응하라고 말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과 어우러 사는 게 불편하다는 걸 경험을 한 나는 그러기 싫었다. 그 결과 나는 또 한 번 외톨이가 되었고, 방어벽을 치고 나를 또 가두었다.



그 선택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내면의 나에게 한 달간 끊임없이 질문했다. 저 사람이 어떤 게 싫은 건지. 나는 그들과 왜 어우러지려고 노력을 안 했는지 말이다. 그 결과 해답을 오늘에서야 찾았다. 나는 외골수의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예기불안이 있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예상하면서 그것이 현실이 될 거라고 늘 생각했다. 한 번도 친구를 친구로, 지인을 지인으로 가만히 두고 유지하고 관계를 맺는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대인기피증도 있고, 불안증세도 있는 나는 오늘 나 자신을 이겨냈다.


맞는 방법이었을지는 모르겠으나, 가장 친한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조언을 구했다. 조언을 구하면서 친구가 내뱉는 한 단어, 한 문장을 곱씹고 곱씹으며 나를 보기 시작했다. 사람은 평생 건너편에서 본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고 하지 않나. 거울에 비친 모습도 시야의 각도나 보는 이의 시력 등으로 인해 약간의 왜곡이 일어나기 때문에, 실제와 완전히 같은 자기 자신의 모습은 육안으로 볼 수 없다. 사람마다 다 다르게 생각하는 '나'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덩어리로 만든 다음 한 줄로 뽑아낼 수 있겠는가. 결국 '자아의 완성'은 삶 속에서 가장 이루어내기 힘든 인간의 과업이 된다. 타인의 관점에서 본 나를 요약하여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돌이켜 본 결과, 그들에게 나는 안 그래도 속 시끄러운 회사운영 방침에 더해진 거슬리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원년 멤버와 새로 들어온 직원들 사이에서 곁을 안 주는 게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들이 다가와도 벽을 쌓았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알지만, 나는 친해지려고 하는 아이스브레이킹이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고, 사다리게임해서 음료수를 사자는 간단한 게임조차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청해 오는 인사와 호의를 철저하게 무시했다.


사람이라면 '내'가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그리고 '나'는 어떤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는지 확인하고 싶을 때가 있기 마련이다. 나아가 어떻게 삶을 풀어가고 싶은지 결단이 딱 내려졌으면 좋겠을 때가 누구에게나 있지 않나.


오늘의 나는 나를 보았다. 내가 남이 되어 나를 본다면 재수 없는 인간 그 자체였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많은 오해들이 쌓였고, 그들은 나를 판단하기 시작했다. 나는 거기서 불편감을 느꼈고, 나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나를 숙이고 다가가는 방법을 택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나는 이런 사람이고 나는 이런 마음이었는데, 내 행동으로 인해 불편감을 느꼈다면 깊이 사과하고 싶다고 솔직하게 다가갔다. 이 말을 하기 전까지 손이 떨리고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결과는 생각보다 좋았다. 이거였다. 정말 별게 없었다. 그냥 솔직하게 나라는 사람을 보여주고 내 패를 까면되는거였는데, 이걸 하지 못해서 예기불안이니 대인기피증이니 이기적인 사람이니 이런 타이틀 안에 나를 가뒀었던 것이다. 이 글을 보는 어떤 사람은 사회생활 15년 만에 사람 사귀는 법을 이제야 알았다면서 놀랄 수도 있겠다.


늘 들어왔던 얘기지만 오늘은 다르게 들렸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내게 관심이 없다는 말, 상대가 나한테 하는 행동은 거울이라는 말, 사람을 사귀다. 어우러지다. 별거 없었다. 공감이었고,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었다. 오늘을 계기로 나는 더 이상 예기불안과 대인기피증이 내게 찾아오지 못하게 상대방을 미워하거나 불만을 가지진 않으려고 한다. 세상에 독고다이는 없다. 고독이 좋다지만, 동반은 더욱이 행복한 것이란 걸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조급하게도 예민하게도 생각하지 않고, 물 흐르듯이 생각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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