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남 그릇만 쳐다보고 살 순 없잖아요?
서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자기혐오와 질타들로 가득 차있었다. 출산 후엔 다른 삶을 살아보리라 마음먹었다. 아이를 낳은 어미의 책임감이었을까. 나 같은 아이는 죽어도 만들기 싫어 온 우주와 별을 담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너에겐 꼭 부재를 만들지 않으리라 마음을 고쳐먹었다. 우리는 그것을 성찰, 성장, 철들었다.라고 표현하더지 아마.
마음이 힘들고 나 자신에게 질타가 시작될 때 나는 정신질환 관련 영상들과 자료들을 수집한다. 인터넷에 나의 증상들을 적다 보면 감기가 암처럼 큰 병으로 여겨진다는 말이 있다. 이와 같이 나도 수많은 정신과 진단명을 내게 대입했다. 진단의 시작은 체크리스트로 시작된다. 10개의 문항 중 절반 이상이 해당되면 나는 대단히 심각하고 문제 있는 사람으로 분류된다.
강박장애, 회피성 성격장애, 자의식 과잉, 경계성 성격장애, 결핍된 내면아이, 애정결핍, 분노조절장애, 양극성 인격장애 등 무시무시한 말들로 나를 분류해 버리면 인적 없는 산속 어딘가에 습습하고 차가운 깊은 우물 속의 발가벗고 쪼그려 앉아 있는 불쌍한 아이가 된다.
그래서 방문했던 정신과 병원에선 조금 치유를 받아보고자 내심 부푼 기대를 가지고 상담실로 들어갔다. 인자한 얼굴의 편안한 인상을 가지고 '천천히 말해보세요.' 하고 기다려 줄 것 같던 의사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제법 덩치가 우람한 의사 선생님이 '앉으세요. 어떻게 오셨죠?'라는 질문을 건넸다. '제가요.. 사실 요즘 너무 우울해요.' 하고 내 얘기를 하는 순간 눈물이 흘렀다. 뽑아 쓰는 휴지가 눈앞에 있었고 한 장 뽑아줄 법도 한데 의사는 ('괜찮아 보이는데 왜 왔어요?')라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라. 두 번, 세 번 정도 찾았을 때였나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주고 내 인생에서 그 부분을 도려낼 줄 거 같았지만, 기대했던 상담은 없었고 오히려 덤덤하게 상담을 해주었다.
'주희 씨 인생에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요. 결국 내가 마음먹기 나름입니다. 부모는 나한테 막 대했는데, 나는 부모를 섬기라는 법은 없습니다. 부모는 주변인에게 상처를 주는데 본인은 그걸 수용하라는 법도 없고요. 할 수 있다면 부모랑 연 끊으셔도 됩니다. 인간이기에 부모를 섬기지요. 이 세상 그 어떠한 동물도 부모를 섬기는 동물은 없습니다. 본인이 자각하고 이렇게 병원을 찾았다는 것 또한 어떠한 질병도 없는 거고요. 진짜 환자들은 자기가 아프다는 걸 잘 모르죠.'
이 조언은 살면서 누군가한테 한 번은 들었던 기억이 뇌리에 스쳤다. 같은 말이었지만 그 순간 나는 우물 안에 있는 나에게 '자, 이제 나와!'라고 소리쳐주는 기분이었다. 나의 존재에 대해 수용해 주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그 말은 온기는 없었지만 나를 서서히 일으켰다.
나는 늘 하늘에 둥둥 떠 있는 것 같고 내가 누군지, 뭘 하고 싶은지,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이걸 정말 해도 되는 건지. 날 잡아주는 손잡이 끈 하나 없는 풍선 같은 인생이었다. 어느 순간 뻥 터져버려 파편하나 보이지 않아도 누구도 걱정하지 않을 거 같은 그런 풍선 같은 삶이었다. 의사의 그 말은 내가 어떤 걸 붙잡고 있었는지, 무얼 갈망하며 살았는지 깨닫게 했고, 희미한 불빛 같은 게 아른거렸다.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처음엔 인상 좋고 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내다 보니 마음이 여려. 알고 보니 순두부야" 이 말을 자주 들었는데, 나는 가면을 쓰고 살았다. 마치 신데렐라라도 된 거처럼 '어렵고 힘들었지만, 잘 이겨내고 잘 컸습니다. 짜잔.' 이런 말을 듣고 싶었던 어릴 적 마음으로 늘 살았던 거였다. 그것만이 내가 살아온 가여운 인생이 보답받는 느낌이었으니까. 몇 차례 상담을 통해 알게 된 것이 있다면, 내 얘기를 누군가한테 다 털어놓고, 나 어떻게 해야 할까?로 의존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느끼는 모든 것을 적었다. 그게 감정이든 생각이든.
두서없이 중구난방 퍼트려 놓은 그간 글로성장챌린지의 글들이 씨앗이 된 것일까. 생각하는 모든 걸 적으니 글감이 되고, 성찰을 경험하게 된다. 요즘은 제법 괜찮은 하루를 보내고 있다.
문문의 비행운이라는 노래 가사 중 '나는 자라 결국 내가 되겠지.'라는 가사 한 소절이 떠오른다. 상처받은 나는 자라 결국 내가 되겠지. 상처받은 흉터는 없어지지 않는다. 문득문득 떠오를 거고 방어기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해서 백날천날 상처만 보고 살 수는 없는 법.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불안 장애를 겪던 작가의 에세이가 많은 인기를 얻었던 것처럼 나 또한 부정하고 함구 속에서 아무도 듣지 않지만 괴성을 지르던 나는 내가 제일 잘 안다. 어디부터 치유를 해야 하는지도. 어떤 상처가 가장 아팠는지도.
가면을 쓰고 살지 않아도 되고, 다른 가면을 꺼내들 필요도 없다. 정밀화를 그릴 때처럼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나오는 빛의 표현들처럼 나를 낳은 내 부모도 나를 키운 내 조부모도 다 다르게 생각할 거고 내 내면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에 와서 왜 나를 이렇게밖에 키우지 못했냐고 한탄하고 울부짖는 들 알아들을 양반들도 아니다.
내가 나인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족하게 여길 이유가 없다. 내 그릇엔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내가 감례 할 수 있는 것들을 담으면 된다. 의연해지기까진 아직 많이 남은 것 같지만 그래도 내 것을 담을 그릇은 꺼내지 않았는가.. 담다 보면 넘칠 것이다. 그럼 또 다른 그릇으로 바꿔도 된다. 혹시 이 글을 읽는 나와 비슷한 상황의 당신이라면 당신을 담을 그릇부터 꺼내보자.
그리고 담아보자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