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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y Mar 17. 2022

후암동에서 간단하게 행복해지는 방법



 "행복이 뭐 별건가?" 순과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이성의 끈을 절대 놓지 않는 순과, 감성을 어떻게든 버리지 못하는 내가 전적으로 공감하는 말. 2019년 신혼집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살고 있는 이곳 후암동은 우리에게 매일매일 행복을 느끼게 해주는 신묘한 동네다. 이동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불행해지고 마는.. 순이를 고려해 후암동에 처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었다. 다른 동료들이 출퇴근 길을 버스와 지하철에서 보낼 때, 우리는 도보 15분 거리에 있는 회사를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것이 큰 안정감을 줬다.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출퇴근 패턴이 비슷하고 길에서 회사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점도 즐거운 포인트가 되었다. 몸만 컸을 뿐 거의 등하굣길과 비슷한 수준이다.


 주말이 되면, 혹은 재택근무 중 점심시간이 되면 우리는 자주 남산을 오른다. 후암동에 산다는 것은 높은 언덕길, 아찔한 계단과의 동행에 익숙해지는 것과 동시에 남산과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진다는 것을 말한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남산타워 길이나 남산식물원 이외에도, 충무로/한남동으로 이어지는 남산 둘레길은 집에서 5분만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야생 운동장이 된다. 순과 나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남산둘레길을 오랫동안 뛴다. 남산도서관에서 백범광장으로 이르는 구간은 봄이 되면 흐드러진 벚꽃길이 되고, 가을이 되면 여느 남쪽 지방의 단풍길이 부럽지 않게 색을 바꾼다.


 후암시장을 사이에 두고 동후암동, 서후암동의 분위기는 사뭇 다른데 내가 살고 있는 동후암동 라인은 100년 가까이 된 적산가옥과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건물들이 마주 보고 있다. 요즘들어 협소주택들도 많이 지어지고 있는데 아마도 이곳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지 않을까.

또 후암동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젊은이들만 모여 살거나 어르신들만 모여 사는 곳과는 달리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어린이들의 비율이 적당하다. 언젠가 건축사무소장의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좋은 동네의 기준은 다양한 연령들이 고루 살고 있는 동네라고 말하던 것이 기억난다. 그도 그럴것이 후암동은 내가 알던 서울의 이전 동네들과는 달리 특유의 가족적인 분위기가 있다.


 다양한 맛과 멋이 있는 점도 매력이다. 후암동에서 해방촌, 이태원으로 넘어가는 골목길은 독특한 개성이 있는 카페부터 글로벌한 음식을 다루는 다이닝바들이 즐비하다. 프랜차이즈보다는 개인 영업점이 많고 가게들은 대체로 크기가 작아 어딜 가든 소란스럽지가 않다. 자동차로 접근하기에 어려운 곳이 많아 두 다리로 걸어 다니며 볼 수 있는 것들도 많다. 오래된 물건을 파는 빈티지 소품 샵이나 주인의 멋진 안목으로 데려온 빈티지 의류 가게들이 그렇다. 집과 집이 모인 빼곡한 언덕을 멀리서 볼 수 있는 해방촌 전망대에 오르면, 다른 동네에서 놀러 온 이들의 카메라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잠시 쉬어가는 어르신들을 위한 1인용 의자를 볼 수 있다. 전망대에서 보는 서울의 꽉 찬 야경은 부산 수정동이나 아미동에서 보던 풍경을 떠올리게 해서 사람 사는 곳은 결국 다 똑같구나 하는 안도감도 느낄 수 있었다.


 결혼 후, 좀 더 안정감 있는 생활과 여유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던 것은 아마도 후암동에서 일상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의 많은 상징(서울역이나 남산타워)을 끼고 있다는 바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골목 구석구석에는 알려지지 않은 작은 낭만들이 있다. 나는 그것들을 찾고, 또 온전히 느끼면서 간단하게 행복해지고 있다. 괜히 어려워 보이는 행복이라는 감정을 민망할 정도로 손쉽게 느끼고 있다. 이건 정말 (자칭) 럭키걸의 삶이 아니던가?


 '동네'가 주는 상상 이상의 행복. 혹시 이러한 종류의 행복을 절실히 찾고 있는 이가 있다면 당신에게 꼭 맞는 동네를 찾아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연히 탄 버스에서 마주친 낯선 풍경에 고개를 돌리듯, 비슷비슷한 빌라와 그저그런 슈퍼마켓이 있는 골목길이지만 어쩐지 나를 알아보는 것 같은 그런 신묘한 동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추신. 후암동에서 간단하게 행복해지는 순간 & 공간


- 카페 밀영 / 밀영에서 보는 은행나무 / 그 아래 의자들 / 그리고.. 저녁엔 그 앞 고깃집

- 후암동 종점에서 돌아가는 버스들과 택시들 / 마을 버스정류장

- 카페 오이스터에서 바라보는 경사진 도로 / 바로 옆 오래된 이발소

- 골목길에 숨은 작은 놀이터들 / 어르신 전용 운동기구들

- 중국집 동천홍의 짜장면과 탕수육 / 할인을 해주는 요일 메뉴

- Taffin 같은 프랑스 빵집 / 미국 햄버거 그 맛 더백푸드트럭

- 카페 레드리프 같은 원두가 맛있는 곳  

- 후암시장의 떡집 / 과일가게들 / 1인을 위한 미니 족발집

- 남산도서관 진입로 / 두텁바위라고 적힌 바위

- 해방촌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야경 / 남산타워 전망대로 향하는 케이블

- 골목길 곳곳에 있는 염화칼슘 보관함

- 남산도서관 맞은 편에 있는 용산도서관

- 참기름, 깨 파는 가게 / 직접 말린 고추를 파는 가게

- 주민 화합 행사들(걷기 대회, 글쓰기 대회..)

- 젊은이들의 열기가 느껴지는 작은 스튜디오들

- 후암동 최초 에스프레소바 오르소 / 후암동 최초 커피 오마카세 노리밋

- 회사에서 보는 남산타워 / 도서관에서 보는 남산타워 / 시장에서 보는 남산타워

- 해방촌으로 올라가는 길목 / 위에서 내려다 보는 골목길 풍경

- 저긴 어디야 했는데 예쁜 건물들과 사무실 / 예쁘진 않지만 귀여운 철물점들

- 여긴 어디야 했는데 작은 공방들(목공방, 가죽공방..)

- 가끔 오는 이태원 치킨맨 아저씨 / 순대 아저씨 / 타코야끼 아저씨

- 구불구불한 1차선 도로 / 차 한 대가 겨우 다니는 골목길

- 당근마켓 직거래 성지 후암시장 / 시장 안에 자리잡은 아주 작은 재즈바

- 후암주방, 후암거실, 후암서재 같은 공유 공간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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