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두부와 막걸리가 준 기묘한 힘에 대해
아침에 눈을 뜨니 사방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여러 호텔에서 봐왔던 끄트머리만 포레스트 뷰거나 그런게 아니라, 진짜 '찐' 포레스트 뷰였다. 서걱서걱하는 호텔 이불은 아니었지만, 새벽녘 산골 마을의 낮은 기온을 감당하기에 충분했다. 혼자 밖으로 잠깐 나와 벤치에 앉아, 이른 아침 공기를 맡았다. 이름 모를 새들이 머리 위를 날아다니고, 아침 바람이 선선히 불어왔다. 건너편 건물에서 주인 내외가 방금 마친 것 같은 이불을 들고 와 햇볕 아래에 널고 있었다. 꾸준히 공간을 가꿔나가시는 모습을 보며 어젯밤에 잠시 했던 내 생각들이 너무 작아 보였다.
둘째 날 일정은 간단했다. 온통 산과 호수인 곳이라 유명한 관광지들의 느낌도 비슷해 어딜 가든 한 곳만 가도 도시의 전체를 알 수 있다. 우리는 숙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들을 향했고, 아기자기한 관광지들을 둘러봤다. 출렁다리, 스카이워크, 둘레길, 숲속 계곡, 작은 사찰같이 흔하디 흔하지만 안 가면 아쉬운 곳들. 순은 종종 내게 말했다. 여행은 왜 가는지 잘 모르겠다고, 한국은 어딜 가든 다 거기서 거기라고. 극단적 집돌이인 순을 끌고 다니는 나는 언젠가 순이 이 모든 것들의 소중함을 느낄 거라 생각한다. 여행 내내 철없는 아들을 묵묵히 지켜보는 엄마의 마음을 유지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가 우연히 맞닥뜨린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와~'하고 내는 소리에 집중한다.
근데 여긴 참 희한하다.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산세. 그런데 여긴 느낌이 다르다. 어떤 특정한 공간에 가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고 느끼는 것처럼, 너무 평범한 시골 풍경으로 인해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서울에선 자신이 sns나 유튜브를 보며 낭비하는 시간도 하나하나 관리하는 순도, 이곳에서의 시간 계산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아는 것 같았다. 아무도 찾지 않던 작은 사찰에서 합장을 하고 멀리 펼쳐진 산봉우리를 한참 쳐다보는 것을 끝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펜션의 노란 장판위에 몸을 누이고 한 시간 넘게 낮잠을 잤다. 둘 다 부스스하게 일어나니 옆 펜션에서는 새로운 팀의 족구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청을 한껏 올리는 신난 목소리, 삼삼오오 들떠있는 대화들을 엿들으며 저녁을 먹으러 갔다. 서로 비슷한 간판과 메뉴를 달고 있는 식당들 사이로 적당해 보이는 자리를 잡았다. 하얀 비닐이 깔린 상 위에 감자전과 손두부, 그리고 막걸리 한 병이 깔렸다. 주인 아저씨가 챙겨주신 직접 딴 상추와 집된장까지 갖춰진 소박한 저녁 차림에서 우리는 말 그대로 행복을 느꼈다. 그건 하루 동안 더 높이 올라갈 수 없는 최대 수준이었다.
막걸리 한 잔과 두부 한 입을 번갈아가며, 앞으로 무엇이든 잘 해낼 것이란 자신감도 음식 위에 더했다. 맛있는 음식과 술,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 앞에서 우리가 못할 게 뭐 있냐고 허풍도 쳐보는 밤. 이건 뜨끈한 손두부의 힘인가, 달콤한 막걸리의 힘일까. 맛이 보장된 미슐랭 식당도, 멋지고 힙한 카페도, 죽기 전에 꼭 봐야할 한국의 명소 100선 같은 것도 없는 이곳에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감정을 채운다. 살아있다면, 살아만 있다면 느낄 수 있는 평범한 행복, 그리고 보기드문 자신감. 우린 이걸 느끼러 여기 먼 곳까지 달려왔었나보다.
덧) 여행의 즐거움을 잘 모르겠다던 순도 이날의 맛은 영영 잊지 못할 거다. 일시적 엄마의 마음으로 직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