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났던 어느 날, 나를 멈춰 세운 한 마디
서른을 넘긴 무렵,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하루,
일상 속의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람 하나가
내 감정을 건드렸다.
왜 그런 날이 있다.
서로 얼굴도 모르고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이
각자의 얼굴 안에
작게 눌어붙은 기억으로 남는 날.
어떤 충돌은,
그저 스침으로 끝날 수도 있었겠지만
어느 날은,
그 순간이 유난히 자주 떠오르게 되는
하나의 사건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날, 참지 못하고
말들이 터지듯 튀어나왔다.
‘진짜 참을 만큼 참았어.’
내 안에서 먼저 달려 나간 건 감정이었다.
성인이 되고서
그렇게까지 화를 낸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순간만큼은 내가 낯설었다.
화를 낸 내가 아니라,
화를 그렇게밖에 낼 수 없었던 내가.
며칠쯤 지나,
퇴근 후, 두 시간을 넘게 기차를 타고
자정이 다 되어서야
고향집에 도착했다.
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할머니는 방금 잠에서
깨운 몸을 일으키며
“아이고 ㅇㅇ, 왔어? “
옅은 미소를 띤 채
내 등을 토닥여주었다.
말은 짧았지만,
그 손길에서 ‘괜찮다 ‘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다음 날, 거실에서 마주 앉아
나는 그 이야기를 꺼냈다.
“할머니, 진짜 내가 그때,
그런 일이 있었다니까요?
어이없지 않아?
진짜 얼마나 화가 났냐면…
뭐 그런 인간이 있는 건지…
나도 못 참겠어서 엄청 발끈하면서 화를 냈어. “
말이 길어질수록
감정이 다시 차올랐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 순간의 나로 되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여든 해를 건너온 눈빛이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 입술이 열렸다.
ㅇㅇ야, 씅 내지 마라.
네가 그 사람보다 두 배 이상은 열이 내야,
상대를 그 반만큼만 열받게 할 수 있어.
그러면 너만 손해여. 그러니깐 그러지 말어~
뜻밖의 말이었다.
나는 분명 억울했고,
누가 봐도 그 사람이 잘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 당당하게 말했던 건데,
앞에 어른은 내 편을 들어주기보단
내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았다.
그 담백하고 단정한 말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덧붙일 수 없었다.
앞에서 늘어놓았던 내 말들을
하나도 언급하고 싶지 않을 만큼,
이내 차분해졌다.
그 말은 이상하게 오래 남았고,
지금도 꺼내볼 때마다
다시금 고개가 끄덕여진다.
정말, 그 말이 맞더라고.
상대를 열받게 하려면
내가 먼저 두 배로 열이 나야 하니까.
그리고 그 열은
항상 나만 태우고 지나갔다.
그제야 알게 됐다.
화를 내지 말라고 한 게 아니라,
나를 잃지 말라는 거였다.
화를 낸다는 건
그 자체로 나쁜 일이 아니지만,
때때로 감정보다 더 많은 것들이
그 말 안에, 표정 안에 담긴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언제나 되돌릴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몸으로 다 익히진 못했다.
화를 누를 때면 가끔 지는 기분이 든다.
말을 삼키고 돌아서는 순간,
나 혼자 조용히 져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 그 말을 떠올린다.
“씅 내지 마라.
그 말이 꼭 너 자신한테 날아올지도 모르잖아.”
나는 감정을 감추지 않는다.
다만, 감정을 무기로 쓰지 않으려 한다.
마음이라는 건
그렇게 쉽게 흘러넘치고 나면,
나중에 나를 더 괴롭히기도 하니까.
나는 이제야 조금씩 배우는 중이다.
화를 삼킨다는 건, 참는 게 아니라
나를 지키는 방식 중 하나라는 걸.
이 글이 현재,
분노로 지친 마음들에게
한 박자, 숨을 고르게 하는
휴식이 되었기를 바란다.
[ 작은 메모 ]
보라색 꽃이 참 곱게 피었더라.
마당을 돌다가 눈에 띄어서
새로 생긴 폰으로 몇 장 찍어봤지.
폰이 좋아서 그런가,
사진이 아주 선명하게 나왔어.
내가 찍었단 말에
다들 놀라는 눈치였어.
그래서 괜히 자랑처럼
가족 단톡방에 올렸지.
이 폰 말이야,
접히는 거라며
꼭 한번 써보고 싶다 했었는데,
우리 자식들과 손녀들이
그걸 사줬지 뭐야.
색깔도,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으로.
조만간 옆집 할매한테
자랑 좀 하러 가야겠어.
참 고맙더라.
근데 내가 성격이,
고맙다는 얘기를 잘 못 해.
마음만큼 말이 잘 안 되더라고.
어쩐지,
오늘은 그 손녀가
전화할 것 같은 기분이야.
내 맏이 손녀지.
언제나 재잘재잘 제일 시끄럽고,
투덜거려도 속정이 꽤나 깊은 그 아이.
그리고,
그녀의 마음을 잠깐 빌려 쓰는
이 글을 끝으로,
전화를 드려야겠다.
그럼, 나에게 이렇게 말하겠지.
“ㅇㅇ야, 항시 차 조심하고,
밥 잘 챙겨 먹고,
너무 늦게 돌아다니지 말어라.
집에 또 내리와. 고마위~”
여든을 건너온 마음 하나가
내 서른 중반을, 따뜻하게 어루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