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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혁H Sep 13. 2021

헤진 만큼 쌓여간다 : 손목시계

21.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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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계를 얻게 된 건 2019년 10월의 일이었다. 지겨웠던 시험이 마무리되고 비로소 맞는 편안한 주말, 수방사에 근무하던 군인 친구와 오랜만에 중구 일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전에 명동에서 영화를 같이 보고 점심으로 시청 근처 피자집을 들린 직후였다. 때마침 ‘2019 정동 야행’이라는 문화행사가 덕수궁을 둘러싸며 정동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었고, 오후의 한가함을 속속들이 재미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아 발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만연한 가을의 정취 속에서 돌담길을 따라 여러 플리마켓과 체험프로그램 부스들이 길쭉히 늘어서 있었다.

당시 아빠의 생신이 얼마 안 남은 상황이었기에 여기까지 온 김에 선물도 미리 골라가고 싶었다. 흥겨운 축제 현장을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부스 하나를 찾을 수 있었고, 그 곳에서는  수제 가죽 지갑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신중히 물색하다 딱 알맞은 제품을 겟-하고 자리를 뜨려던 찰나, 바로 옆 테이블에 놓여있는 여러 가죽시계들을 보게 되었다. 마침 새로 손목시계를 장만하려던 참이었기에 절로 눈길이 갔다. 저렴한 가격에 디자인 역시 무난하고 소박하니 괜찮았으며, 사이즈도 부담스럽지 않은 가벼운 재질이었다. 지금이 기회다 싶어 곧바로 구입을 결정하고 이윽고 손목에 착 찬 채로 골목을 나왔다. 한 자리에서 필요하던 두 가지를 모두 말끔히 해결했다는 개운함, 간만에 내 취향과 니즈에 알맞은 물건을 골랐다는 뿌듯함. 이 두 쾌감이 신나고도 알차게 보낸 주말의 희열과 뒤섞이며 마음 한가득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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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계를 한동안 써오다가 풀게 된 건 입대까지 겨우 10일밖에 남지 않은 2020년 4월 즈음이었다. 도무지 사그라들지를 않는 팬데믹의 유행세가 겨울이 끝나가기 무섭게 서울을 빠르게 잠식하기 시작했었다. 방학 간 일했던 아르바이트들의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짐을 싸 거의 피난가듯이 일상의 위협을 벗어나려 했다. 봄이 시작됨과 동시에 서울을 떠나 그나마 안전하고 고요한 편이었던 고향 목포로 돌아왔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한달 넘게 칩거 생활을 지내곤 했다. 방학 간 모아둔 돈으로 입대 전 두 차례 해외여행을 다녀오리라던 나의 포부와 소망은 처참히 취소될 수 밖에 없었다.  

하루 하루 가는 속도는 매섭다 못해 메스꺼웠고, 그저 현재의 시국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어느 무엇도 좀체 만족스럽지 않았으며 지독한 고립과 우울을 씁쓸히 맛보기까지 했다. 소중한 이들과 마지막으로 함께 하는 시간은 참 짧게만 느껴졌고 그렇게 달력 속 숫자는 4월의 하단부까지 다다랐다. 그러던 어느날 6년째 알고 지내던 형이 갑자기 입대 선물로 디지털 시계를 선물해줬다. 군대에 있을 때엔 시계 하나 제대로 갖고 있는게 중요하다며 보내준 것이다. 정말 뜻밖의 선물이고 또 아주 유용할 것 같아서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더불어 새삼 얼마 뒤 진짜로 군인이 된다는 게 한층 실감이 나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 배송이 완료되어 손목에 새로 감게 되었고, 원래 차던 가죽시계는 다시 풀어 책상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또 다른 며칠이 지나고 신교대에 마침내 들어섰다. 이렇게 된 이상 선물받은 시계와 함께 군 생활 오래 버텨보자는 나름의 결심으로  호기롭게 들고 갔다만, 안타깝게도 새 시계의 수명은 그리 길지 못했다. 수료식을 치르기 전 주 각개전투 훈련을 하다가 시계가 우당탕 고꾸라져서 시계줄과 시계 유리가 긁혀버렸다. 후반기 교육과 보충대까지 거치고 우여곡절 끝에 자대에 오니, 시계는 처음 입대했을 때와는 다르게 꽤나 너덜너덜한 꼴이 났다. 아까웠지만 지속되는 거친 상황 속 손상을 어떻게 고치거나 막을 방도가 없었다. 아쉽더라도 필히 요긴하게 활용하긴 해야하니 그저 불안정하게 쭉 달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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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계를 다시 찾아서 써먹게 된 건 2020년 9월, 신병휴가 때였다. 결국 새 시계의 스트랩과 연결 부분이 부대 내 작업을 하던 도중 완전히 찢겨져나가 도저히 사용하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시계 유리에도 상당히 금이 간 상태라 본체 부분만 따로 휴대하는 것도 보는데 약간 불편하곤 했다. 다른 제품을 새로 구매하기에는 꽤나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아예 없이 지내면 생활에 어려움이 많을 것 같았다. 이러던 상황에 굉장히 난처해졌는데 불현듯 잊고 있던 물건 하나가 떠올랐다. 본가 집 내 방 한구석에 두었던 그 가죽시계의 존재가 아직 남아있던 것이다. 신병휴가를 나가게 되면 집에 들르자마자 그 시계부터 찾아 꺼내놔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얼마 안 있어 신병휴가 일정이 결정되었고, 예정에 맞춰 휴가를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5개월만에 비로소 만나는 집의 반가움도 잠시, 짐을 풀자마자 당장 급선무이니만큼 그 시계의 행방부터 살펴봤다. 책상 한켠에 그대로 자리한 시계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를 손목 위로 다시 찼다. 다섯 달만에 피부에 닿으니 왠지 모르게 이전보다 더 가볍고 더 착 달라붙는 듯 했다. 그렇게 되찾은 시계랑 같이 보내던 휴가는 정말이지 잽싸게 지나갔다. 그 속도감은 마치 입대 직전 새로 시계를 선물받았던 그 즈음과 거의 동일한 수준의 빠르기였다. 다른 시계 그리고 다른 여건들로 이루어진 상이한 시차였지만, 체감 상의 시간만큼은 유사하게 흐르는 것 같았다.

휴가 복귀 후, 신병 시절과는 판이한 ‘찐' 군 생활이 제대로 시작되었다. 계원 업무에 당직 근무, 분대장까지 본격적으로 맡게 되면서 늦가을부터선 분주한 나날들이 연달아 이어졌다. 이리저리 바삐 불리고 치이며 쉴 새 없이 일이 쏟아지기도 했다. 몸과 마음 어느 하나 피곤하지 않은 때가 드물었던 시기였다. 그러면서도 신기하게 그 손목시계는 고장이나 훼손 하나 없이 멀쩡히 작동되었다. 작은 금조차 생기지 않았고 쉽게 헐거워지지도 않은 채 쭉 사용할 수 있었다. 정신을 다시 가다듬어보니 어느새 달력은 금방금방 넘어가 새해 새 계절이 다가오게 되었다. 10개월 남짓하는 시간 동안 그 시계는 손목 위에서 가늘고 길게 버텨갔으며, 나 역시 차근차근 군 복무를 지탱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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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온 이후, 내가 본디 가진 많은 것들이 몰아 닥치는 변화 앞에서 무색했다. 요금제 때문에 별 수 없이 3년 반째 소지하고 있는 핸드폰 말곤 오래도록 유지되는 사물이라곤 찾기 힘들었다. 밖에서 즐겨 쓰던 것들을 안으로 들이기엔 제약이 컸고, 생필품이나 일상용품은 몇 주 몇 개월 간격으로 교체하면서 사용하게 되었다. 옷차림, 두발, 행동양식은 규율에 맞게끔 당연하게 바뀔 수 밖에 없었으며 심지어 성격이나 가치관, 인간관계의 양상마저도 사뭇 달라진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적어도 예전 20대 초반의 황준혁과 그 주위를 고스란히 되살릴 수는 없다는 게 명확해졌다. 그런 마당에 그 손목시계야말로, 현재 소유하고 있는 물건 중에서 그래도 가장 꾸준히 자리를 지켜온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19년도의 가을부터 이듬해 봄. 또 다시 그 해 가을부터 21년도 여름에까지. 나에게 다가온 여러가지 삶의 파랑마다 늘 같은 데서 동반자처럼 버텨왔던 시계. 파란만장하게 세월이 지나니 차츰 얼룩이 지고 구부구불해졌지만 결코 함부로 버리지 못했다. 가늘고 길게 이어져온 시계가 수명이 끝나면, 내가 이곳에서 견뎌온 자취 역시 덩달아 소실되는 것 마냥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것일까. 조금씩 헐거워지던 시계가 덜렁거리며 매달리기 시작하더니, 며칠 전 야간 근무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이음새가 완전히 느슨해져 엇나가버렸고 시계줄이 떨어져나가고 말았다. 땅바닥에 떨어진 시계를 도로 주울 때엔 가슴 한편이 철렁이고 잠시 멍멍하곤 했다.

오래 쓴 물건에는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다. 시간이 갈수록 닳아지는 사물들에는, 헤진 만큼의 기억들이 무형으로 켜켜이 쌓이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그 손목시계는 디자인이 대단히 아름다운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멋드러진 기능이 결부되어 있는 물건도 아니었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는 정말 애틋하고도 고마운 존재였었고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소장품이었다. 풀어진 시계는 현재 관물대 안에 따로 보관해두고 있다. 가죽 스트랩 뒷편 얼룩 진 자국들이 마치 나이테처럼 보인다. 그 시계와 같이 나눈 군 복무의 기억이 여전히 줄무늬처럼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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