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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o Jun 27. 2023

상실에 대처하는 현대 일본 영화의 흐름, 그리고 변화

다케시에서 히로카즈까지 

“바다를 무척 좋아한다. 모든 생물의 고향이 바다 아닌가. 바다로 가는 것은 원점으로 회귀하는 것이고, 그게 매우 묘한 느낌을 준다.” 한참이나 지난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 중 기타노 다케시의 말을 그대로 인용했다. 그러고 보니 다케시의 영화에서는 바다가 자주 등장했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1992)을 시작으로 ‘다케시’라는 이름을 확실히 새긴 <소나티네>(1993), <하나비>(1997), 그리고 ‘다케시’스럽지 않은 <기쿠지로의 여름>(1999)에 이르기까지 바다는 서사를 끌고 가는 직접적인 도구이거나 서사를 완성 짓는 마침표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데 바다로 가는 것이 원점으로 회귀하는 것이고, 또 그게 묘한 느낌을 준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 질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고 의미 있는 답을 내놓기 위해선 꽤나 진지한 고민이 필요해 보였다. 바다의 쓰임새에 천착해 현대 일본 영화의 흐름을 살펴보던 중, 하나의 변화가 눈에 띄었다. 버블경제가 막 시작된 80년대 후반 이후부터 약 10년 동안 개봉한 일본 영화들은 마치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기라도 한 듯이 상실감에 젖어 무기력함에 빠져있다면, 이후 개봉한 영화들은 이러한 상실감에서 조금씩 벗어나려는 시도가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흐름의 변화는 어떻게 설명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더욱 중요하게는 이 변화는 영화 속에서 어떻게 반영되어 연출되었는가?      


이런저런 궁리 끝에 어쩌면 프로이트의 논문 ‘슬픔과 우울증(멜랑콜리)’이 유용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도 있단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왕에 프로이트에게 빚을 져야 한다면 정신분석학의 죽음충동 개념까지 마저 빌려 쓰면 그리 나쁘지 않은 분석이 가능하겠다 싶었다. 결국 이글은 90년대 이후 현대 일본영화가 상실에 대처하는 방식의 변화를 애도와 멜랑콜리의 차이로 살펴보고, 동시에 바다라는 장치가 활용된 방식을 해석하기 위한 실험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1987)은 젊은 연인들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상실을 다룬 소설이다. 전후 급속한 경제적 발전을 이룬 일본은 198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버블경제가 붕괴되면서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 시작되는데 <노르웨이의 숲>은 일본의 장기불황의 문을 스스로 탄식하며 열어젖힌 문학적 신호탄이었던 셈이다. 언젠가 하루키는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살아가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다면서, 이른바 포스트 냉전 세계의 존재 방식을 그리고 싶었으나, 완전함에 다다를 수 없음을 고백한 바 있다. 그러면서 본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혼란과 고독, 그리고 상실을 헤쳐 나가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그려내고 싶었던 것은 그들이 구원에 다다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구원받기 위한 조건, 즉 심연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내려가야 하는 것이었음을 강조했다.      


잠깐, 심연의 가장 깊은 부분이라니, 이건 다케시가 말한 원점으로의 회귀와 같은 맥락이지 않은가. 아마 이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의 의식이 버틸 수 있는 최대치까지 밀어붙여야지만 다다를 수 있는 구원의 조건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바다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제 발로 온전히 다다를 수 있는 마지막 지점이 바로 바다이며, 더 정확하게는 육지와 바다를 경계 짓는 연안(沿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건 정신분석에서 주요 분석 틀로 삼는 ‘죽음충동’의 예술적 표현과 다르지 않다. 죽음충동이란 쾌락원칙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거칠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세상의 진리는 없다, 라는 것이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진리인데, 인간은 그러한 진리 없음의 공백을 견뎌내지 못하므로 스스로 진리의 공백에 허상의 이미지를 투여하며 존재한다. 그런데 죽음충동은 세상의 의미 있음을 보장하는 이미지를 뚫고 기어코 공백으로 향하고만 하는 본능적 충동이고, 주체를 소멸시키고야 마는 파괴적인 에너지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죽음충동으로의 충동을 간혹 느끼면서도 결국은 쾌락원칙이 보장하는 안정성으로, 즉 연안 이편으로 돌아오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키와 다케시의 작품세계에서는 죽음충동에 대한 파괴적 충동이 그 한계를 이겨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하루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현상을 바라보고 뭔가를 이겨내겠다는 의지나 용기가 없어 보인다는 한 철학자의 지적은 타당해 보인다.            

   

90년대 개봉한 다케시의 세 영화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소나티네>, <하나비>에 등장하는 바다는 등장인물의 죽음충동을 극한으로까지 끌고 가는데 이는 마치 그리스 신화 속 뱃사공들을 노래로 흘려 바다로 뛰어들게 만드는 세이렌을 연상시킨다.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에서 청각과 언어 장애를 앓고 있던 시게루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서핑을 하기 위해 바다로 나간다. 그런 시게루를 여자친구 다카코가 바로 뒤따라가는데 바다 위엔 텅 빈 보드만이 얕은 파도에 떠다니고 있을 뿐이다. 장애를 딛고 일어나 마침내 대회에서 수상까지 한 시게루의 이 느닷없는 죽음은 무엇이란 말인가.     

 

더 큰 문제는 다카코가 시게루의 부재와 홀로 남겨진 서핑보드를 보며 슬퍼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마치 시게루가 언젠가는 바다로 돌아갈 줄 알았다거나, 혹은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한 순리이기 때문에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듯이. 영화 초반부 시게루와 다카코는 집으로 걸어가다 갑자기 방향을 바꿔 다시 바다를 향해 뛰어가는데, 이때 카메라는 이미 화면 프레임 밖으로 나간 이들을 쫓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대신 잠깐이긴 해도, 카메라의 시선은 바다를 향해 있다. 서사의 흐름상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 장면은 불필요한 과잉이었을까? 아니, 이것은 오히려 처음부터 시게루가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임을 예고한 카메라의 선언에 가깝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릴없이 시게루를 바라만 보던 다카코의 시선은 어쩌면 시게루(만)을 향해 있던 것이 아니라, 시게루를 넘어선 바다를 향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어야 할 것이다. 왜 시게루는 파도에 휩쓸려가 죽어야만 했고, 왜 다카코는 슬퍼하지 않았는가? 라고.  

   

우리는 보통 사랑하는 대상(가족, 연인, 혹은 국가와 같은 비인격적 요소 등)을 잃어버리게 되면, 슬픔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슬픔을 앓게 되면 고통스럽다. 때론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진통을 겪기도 한다. 이것은 사랑했지만, (영원히)사라져버린 대상에 투여되었던 리비도를 떼어내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을 겪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애도라 부른다. 그리고 온전한 애도를 완성하기 위해선 사라진 대상을 기억함으로서 소환시키고,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투여되는 리비도의 양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을 조금씩 인지해야 한다. 즉, 도식으로 정리하면, 상실-슬픔-애도(기억)의 단계를 거쳐야지만, 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실패한다면? 크게 두 가지로 애도와 멜랑콜리의 차이를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애도가 슬픔의 대상이 명확하다면, 멜랑콜리의 상태는 왜 슬퍼하는지, 즉 무엇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슬퍼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기억할 수 없고 애도할 수 없다. 둘째, 애도가 무기력감과 자존감의 저하를 겪기도 하지만 결국은 일상성으로 회복하는 반면 멜랑콜리는 그렇지 못하고 극렬한 자기비난(=죽음충동)의 단계로 나아간다.  

    

시게루의 죽음은 과연 사고인가? 영화는 시게루의 사라짐에 대해서 모호한 답변을 내놓는다. 파도가 심했던 날씨도 아니었고, 시게루는 이제 대회에서 상을 받을 만큼 실력이 늘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시게루의 죽음은 어쩌면 자의적 소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카코와 서핑밖에 없던 시게루의 인생에서 이 둘은 진리없음의 공백을 가리는 허상의 이미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그걸 깨닫고 공백을 향한 죽음충동에 이끌려 연안 이편이 아닌 바다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것이라면? 이후 다카코는 시게루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드에 붙인 채 바다로 흘려보내는데 과연 이것은 합당한 애도의 방식이었을까? 그리고 다카코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까? 섣불리 말하자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계속된 반복이지만 다카코는 분명 슬퍼하지 않았다. 아마도 애당초 시게루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바다로 돌아가야만 하는 존재였기에, 잃어버렸다는 명제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슬퍼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은 혼자 남은 다카코의 회상씬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다카코의 회상임을 단언할 수 없는데 그렇다면 이 애도는 기억하지 못한 실패한 애도로 끝날 수밖에 없다.         


<소나티네>와 <하나비>에서는 야쿠자를 소재로 한 폭력과 죽음으로의 충동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나비>에서 니시(다케시)는 상실을 겪었고(완료) 또 다른 상실을 겪고 있는(진행) 인물이다. 니시는 범인을 검거하던 도중 총상으로 부상을 입은 후배 형사 호리베를 잃어버렸으며, 총상으로 그치지 않았던 다나카를 (완전히)잃어버렸다. 그리고 시한부를 선고받은 아내를 잃어버리는 중이다. 니시의 대처 방식은 겉으론 애도의 모양새를 띈다. 평생 불구가 되고 아내와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호리베는 인생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자살 시도를 한다. 그에게 니시는 살아갈 힘(의미)을 부여하기 위해서 미술도구를 선물로 보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홀로 남겨져 생계가 어려워진 다나카의 아내에게는 야쿠자 조직에게서 빌린 돈으로 도와준다.      

    

<소나티네>의 형식은 언뜻 보면 복수극인데, 과연 무라카와(다케시)가 진정 원했던 것이 복수였는지는 의문이다. 일반적인 복수극의 서사는 사랑하는 대상(가족, 연인, 친구 혹은 반려견)을 잃고 슬픔에 잠겨 분노의 에너지를 표출하는 형식이 따르기 때문이다. 무라카와는 눈앞에서 부하들이 총에 맞아 죽어나가도 슬퍼하지 않는다. 아니 슬픔은커녕 당혹스러워 하지도 않는다. 일정부분 다케시 특유의 극도로 절제된 움직임과 화면배치의 구성 탓이겠으나 조직의 부두목 다카하시를 차에서 처리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호텔 회합 장소에서 모두를 향해 총을 난사하는 장면에서는 무라카와도, 그 장면을 보는 관객도 복수의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 차라리 이것은 귀찮지만 처리해야할 과제 정도로 보인다. 마침내 무라카와는 모든 일을 마치고 미유키가 기다리고 있는 바다로 돌아가는데. 굽이진 언덕 너머로 저 멀리 바다의 수평선이 보이지만 무라카와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스스로의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다. 모든 위험 요소가 제거되었지만, 다케시는 왜 안정된 일상이 보장된 미유키(와의 삶)에게 돌아갈 수 없었던 것일까? 이것은 <하나비>에서 니시가 자신을 쫒아온 후배 형사 나카무라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곤 아내와 함께 자살한 장면과 비교가능하다. 호리베에게 삶의 의미를 주려 노력했지만 정작 본인은 연안 너머의 공백으로, 죽음으로의 충동을 이겨내지 못한다.      


결국 다케시의 세 작품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주제는 느닷없는 죽음을 통한 삶의 무상함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무상함은 곧 실재가 진리없음의 공백이자 무임을 알아채버린 상태와 동의어다. 부하들의 죽음과, 죽어가던 아내에게 슬퍼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아무리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일지라도, 공백의 실재를 가리는 허상의 이미지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체의 회복을 위해선, 다시 말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선 연안의 가장자리 혹은 수면의 밑바닥을 치고 올라와 새로운 숨을 내뱉어야만 하는데 영화 속 다케시들은, 익사하고 만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해석은 일본 사회 전체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다케시 개인만의 (무)의식이 영화적으로 재현될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특수가 아닌 보편을 증명하기에 여전히 부족해 보이지만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환상의 빛>(1995)이 적절한 사례로 언급될 수 있다. 어린 시절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잃어버린 유미코는 소꿉친구였던 남편 이쿠오마저 전철 사고로 죽고 만다. 영화는 이후 유미코가 재혼 후 어느 한 바다 마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정확하게는 유미코가 상실의 극복을 어떻게 ‘실패’하는지 그려낸다. 새 삶이 시작되었지만 늘 검은색 옷을 입고 있는 유미코는 나름의 방식으로 애도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오사카로 가 남편과의 옛 기억을 떠올려 보는데, 여기저기 남은 흔적들을 살펴보지만 여전히 남편이 왜 죽었어야만 했는지 답을 찾지 못한다. 하지만 유미코는 오사카에서 돌아온 이후 지금의 남편과의 대화 도중 울음을 터뜨리며 여태껏 해보지 못한 울분을 처음으로 토해낸다. 그리고 뒤이어 마을 누군가의 긴 장례식 행렬에 동참하면서 이제야 진정한 애도의 준비가 된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는 해변가를 따라 걷는 행렬을 롱샷으로 담아내는데, 저 멀리 바다 수평선과 사람들의 키를 가지런히 맞춰 정렬한 연출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행렬에서 유미코의 위치다. 행렬의 끄트머리에서 걷던 유미코는 서서히 행렬에서 뒤처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프레임에 홀로 남겨진다. 여전히 유미코는 떠난 이들의 부재를 극복할 수 없었던 것인가? 마지막 엔딩 신에서 카메라는 2층 유미코의 텅 빈 방에서 열려있는 창문을 통해 바다를 비추고는 그대로 침묵해 버린다. 히로카즈는 이후 <환상의 빛>이 자신의 영화 스타일이 아니라는 말을 남긴 적이 있는데 정적인 분위기의 미장센을 말한 것이었을 터이나, 내면의 본말은 유미코의 온전한 애도를 연출하고 싶었다,였을 것이다.     


이후 잃어버린 10년이 지나고 세기가 바뀌면서 영화 속 바다에서는 상실과 멜랑콜리의 연결고리가 서서히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불필요한 부언이지만 2001년부터 집권하기 시작한 고이즈미 내각의 정치적 우경화는 그저 우연일까.) <기쿠지로의 여름>(1999)에서 기쿠지로는 엄마를 온전히 잃어버렸음을 깨닫고 상실에 빠져있던 어린 소년 마사오의 손을 처음으로 잡아주고 함께 해변을 걸어간다. <걸어도 걸어도>(2008)의 아버지는 큰아들을 잃어버린 상실의 장소인 바다에 10년 만에 처음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리곤 바다를 바라보며 자기의 핏줄이 아닌 손자와 함께 축구경기를 보러 가자고 제안한 것은 상실의 슬픔을 애도로 승화시켜 새로운 다음으로 전진하려는 시도인 것처럼 보인다.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또한 네 자매가 함께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엔딩신은 이들이 이전의 상실(아버지의 떠남과 죽음)을 극복하고 온전한 가족으로 거듭날 것임을 암시한다.             


특별히 마츠가나 다이시의 <하나레이 베이>(2018)는 상실을 애도로 온전히 극복해낸 중요한 작품으로 보인다. 사치는 어느 날 하와이로 서핑 여행을 떠난 아들이 상어에 물려 죽었다는 전화를 받는다. 하와이에서 죽은 아들의 시신과 물품을 인계받는 사치의 표정은 느닷없음에 대한 황망함뿐인데, 여기에 슬픔이 들어설 자리는 ‘아직’ 없어 보인다. 마치 <환상의 빛>에서 제멋대로 떠나가 버린 남편 때문에 무엇을 왜 슬퍼해야 할지 몰라 고통스러워했던 유미코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그런데 <하나레이 베이>는 멜랑콜리에 머물러 있던 이전 영화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우선, 화장된 아들의 유골함을 들고 일본으로 돌아가려던 사치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 섬으로 돌아간다. 이후 사치는 10년 동안 빠짐없이 아들의 기일에 맞춰 하와이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특별한 일을 하진 않는다. 그저 똑같은 장소에 똑같이 앉아 책을 읽는 것뿐. 그러면서 영화는 동시에 아들이 살아있던 시기에 사치와 있었던, 대부분 불화 가득했던 장면들을 회상한다. 즉 이것은 기억을 통해 아들에게 남아 있던 리비도를 떼어내는 사치 나름의 고통스럽지만, 반드시 해야만 했던 애도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작업이 쉬울 리 없다. 죽은 아들과 비슷하게 보이는 외다리 일본인 서퍼를 봤다는 목격담을 듣고는 사실일 리 없음을 알면서도 하나레이 해변 곳곳을 파헤치는 사치의 행동은 <걸어도 걸어도>에서 죽은 아들 쥰페이를 잊지 못해 방 안으로 날아든 나비를 아들로 착각해 실성한 듯한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결국 사치는 아들의 상실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첫째, 10년 동안 거부했던 아들의 손바닥 프린팅을 마침내 받아들고 자기 손과 맞닿아 보면서. 이때 사치는 처음으로 ‘네가 보고 싶다’, 라고 고백한다. 아마 사치는 이 말을 아들이 살아있을 땐 한 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 말을 내뱉는 장면은 회한과 상실 이후의 슬픔을 모두 한꺼번에 토해내는 것이기에 애통함에 젖은 눈물이 수반되었어야 하는 것이다. 둘째, 사치는 아들이 늘 가지고 다녔던 워크맨의 음악을 들으며 처음으로 밝은 아들의 모습을 회상한다. 상실이 더 이상 슬픔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제야 비로소 기나긴 애도의 작업이 마무리된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의 엔딩신이다. 어느 해인지는 모르지만, 다시 하와이를 찾은 사치는 해변가에 서서 바다를 응시한다. 이때 사치는 고개를 돌려 바다의 반대 쪽 길을 바라보곤 서서히 미소 짓는다. 그리고 이 미소는 이제 더 이상 바다를 바라보지 않고 새로 시작되는 삶의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끝으로 글의 도입부 질문에 대한 답으로 마무리 지으려 한다. 연안 저편에 있는 바다는 마치 자궁 속 어머니의 양수와도 같다. 그래서 바다로의 이끌림은 한편으로는 존재의 시원(始元)으로 돌아가는 것임으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편안함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공백으로의 죽음 충동일 수밖에 없다. 다케시가 바다를 좋아하고, 동시에 묘한 느낌을 받는 이유가 바로 이 역설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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