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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모 Mar 27. 2021

네 번째 임신과 유산

시험관 임신의 여정

  문득 대학 친구 생각이 났다.

항상 나보고 팔자 좋게 산다며, 나의 삶이 제일 부럽다던 그녀.

딸을 임신하고서 말했다.

  '우리 딸 이름 진짜 지예로 지을까 봐. 너처럼 살았으면 좋겠어.'

결국 딸아이의 이름은 시아버님께서 철학관에서 받아오신 이름으로 최종 결정이 났고, 나는 왜인지 섭섭하면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왜 나의 삶을 부러워했는지, 어디가 그리 행복하게 보였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173의 키에 늘씬한 그녀는 대학 졸업하자마자 대한항공의 승무원이 되었고, 대기업에 다니는 훤칠한 오빠를 만나 결혼하였다. 어느 신도시에 터를 잡았고, 예쁜 딸은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나도 그녀와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았다. 졸업을 하고 외국계 회사로 취업을 했고, 대학 CC로 오래 만나던 남자 친구와 결혼을 하고 알콩달콩 살았다. 남편도 대기업에 들어갔고, 나도 이직을 하며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었다. 일머리가 좋아서 어디서나 사랑받았다.




  참 순탄하고 평온한 일상을 살아왔으며, 우리는 작은 행복을 소중하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들이었다.

한 해에 두어 번 여행을 다녔다. 길게 유럽이나 미국으로, 짧게 일본이나 홍콩으로. 가족들과 발리로.

참 행복해 보이는 가족사진처럼, 인생이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던 서른넷, 유독 거친 한 해를 맞았다.

나의 인생 드라마가 행복한 가족극에서, 인생극장이나 다큐 3일쯤으로 변경되는 해였다.


 작년 한 해 동안, 세 번의 유산을 겪었다.

그리고 올 2월 또 한 번의 유산을 겪으며, 번째 유산을 맞았다.

이런 건 네 번이나 겪을 필욘 없는데.


  이 순간 대학 친구 그녀가 생각난 것이다.

나의 이 이야기를 들으면 '딸 이름을 내 이름을 따서 짓지 않아서 안도의 한 숨을 내쉴까?' 싶어서.

임신 준비를 하거나, 유산을 하고 몸조리를 하느라 모임에 빠지면 꼭 전화를 걸어서

'너 어디 많이 아픈 거 아니지? 아프면 정말 안돼.'라고 마음을 다해 걱정해주던 그녀였다.

아마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자면, 앉은자리에서 펑펑 울 것 같은 참 좋은 나의 친구.

생김과 다르게 사내대장부 같은 친구인데 (동기들은 아직도 그녀가 승무원이라는 사실에 매번 놀란다)

마음이 여려서 눈물이 먼저 흐르는 그녀. 한 번 놀러 가겠다고 말만 해놓고, 못 본 지 참 오래되었네.






  어릴 때부터 생리가 불규칙해, 임신이 어렵지 않을까 무의식 중에 걱정해왔다.

성인이 되어 규칙적으로 다닌 차병원 산부인과에서 의사 선생님이 웃으며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나 같은 사람은 약발이 너무 잘 들어 쌍둥이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른다며.


  그러나 선생님의 생각과 달리,

약발이 듣지 않아 고전하다 시험관 시술을 진행하게 되었다.


  첫 시도한 시험관에서 바로 성공을 했는데, 주변에서는 다 로또 라며 축하해주었다.

  그리고 7주 차에 처음 유산이 되었을 때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뱃속의 아이가 주수에 맞게 자라지 않았다. 심장이 깜빡였지만, 심장소리는 들려주지 않았다.

소파술(자궁 내막과 아기를 긁어내는 수술)을 하고 나온 아기의 몇 미리 안 되는 몸으로 유전자 검사를 한 결과, 유전자에 이상이 있었다고 했다.

 자연적으로 유전자에 이상이 있는 아이는 도태된다고, 이런 일은 흔히 있다고.


  성탄절에 온 아기라서 태명을 '성탄이'라고 지었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큰 선물을 보내주셨다고.

  우리 부부는 성탄이를 보내며 꽤 많이 울었다. 수도꼭지가 된 나를 한참이나 위로하고, 그만 울라며 다독여 준 남편이, 얼른 자자고 누운 깜깜한 방 안에서 갑자기 엉엉 울어버려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첫 임신을 알고 매부가 사다 준 예쁜 꽃다발. 저 땐 얼마나 감격의 두 줄이었는지!

 1년 동안 50개 넘는 임테기를 해본 것 같은데, 흐리건 진하건 언제나 두 줄이었다. 착상은 참 잘되는 몸인데, 유지가 안 되는 슬픈 몸.

 누군가에게는 임신 준비의 끝을 알리는 두 줄 이겠으나,

 우리에게는 임신 레이스의 시작을 알리는 두 줄이었다.

 

 유산의 가혹한 점은 유산한 지 한 달이 지나도 여전히 두 줄이 나온다는 것.

 난 임테기로 확인해본 적은 없지만, 병원에서 b-hcg 임신 호르몬 검사를 하면 한 달 후에도 피검사에서 꽤 높은 임신 수치가 나왔다. 소파술을 하고 나서 입덧을 하는 사람도 있으니, 참 신비롭고 무서운 호르몬의 세계.

 

-


  두 번째 유산이 되었을 때는 받아들이기가 참 힘들었다.

첫 번째와 똑같았다. 어느 순간 아기가 자라지 않았다. 왜인지 알 수 없었다.

바로 당일 소파술을 진행하기 위해서, 연차를 써야 했다. 팀장님께 전화하면서 엉엉 울었다.

팀장님은 출근길 전철이셨는데, 전화 저편에서 같이 우시는 게 느껴졌다.


  두 번째 아이의 태명은 '찰또기'였다.

제발 찰떡같이 붙어있으라는 마음을 담아서. 두 번째 아이가 가고 난 후에는 마음이 참 많이 힘들었다.

대체로 밝게 훌훌 털어버리고 지내려고 했으나, 혼자 있으면 땅굴을 파곤 했다.


  시험관 procedure가 시작되면, 자가 주사나 질정, 약 먹는 것이 힘들지만 오히려 마음은 희망적이다. 요즘 self-injection을 하고 있다고 하면, 상대방은 대게 얼굴을 찌그러트리며 안쓰러워했지만. 왠지 자가 주사를 놓는다는 말을 내뱉기 어려워, 항상 self-injection이라고 했다. 뭔가 자가 주사보다 영어로 말하는 게 좀 더 있어 보였는지도 모르고.


 반면, 아무런 행위 없이 기다리는 시간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더 힘들다.

소파술을 하고 나서는 상한 내막과 자궁이 회복될 수 있도록 3개월 정도를 쉬어줘야 하는데, 이 시간이 오히려 심적으로 어려웠다.


  이 기간에는 소위 '몸을 만드는' 시간으로 사용하는데, 운동을 하고, 식이 조절을 하고, 영양제를 챙겨 먹는 일들을 말한다. 개인 PT를 끊어서 운동을 하고, 몸에 좋은 것을 찾아 먹고, 영양제도 함량을 따져가며 순도 높은 것, 비싼 것,  외국 것만 사 먹었다.


-

 

  세 번째 아기의 태명은 '꽃송이'였고, 네 번째 아기의 태명은 조카가 지어준 '꿀복이'였다.

오빠의 친한 회사 형이 꽃처럼 이쁜 아기 낳으라고 지어주고, '꿀단지'가 태명이었던 조카는 복 많이 받으라고 '꿀복이'라고 지어줬다. 나에게 아기들은 모두 6주 정도에 하나님의 품으로 갔다.


  아기들은 하늘나라에 가면 천사가 된다던데, 하나님이 요즘 천사가 부족하신가 생각했다.


  나 같은 경우, 극초기 유산이라 소파술만 아니면 몸은 그리 힘들지 않다. (소파술도 마취제에 잠들었다 일어나면 아무 느낌도 없다.) 그리고 마음도 무뎌져 네 번째 유산에는 눈물 많은 남편이 울지도 않았다. 나는 찔끔 흘렸고, 주룩주룩 흐르진 않았다.


  네 번째 유산은 간밤에 배가 아프고 하혈을 많이 해 유산임을 직감하고 병원에 갔다. 가는 차 안에서, 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점심으로 뭘 먹을까 이야기했고, 덤덤한 일상처럼 흘러갔다.


  우리도 시험관 시술에 반 전문가가 되었기 때문에, 다음에는 이 약을 좀 더 써달라고 해보고, 이 검사를 추가해보자며 대책 마련까지 했다.


 -


  반복 유산과 관련한 수십 가지의 검사를 했으나, 모두 '정상'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차라리 뭐가 문제라도 있으면, 약이라도 써볼 텐데 라며 답답해하셨고, 안타까워하셨다.

처음에는 '운이 안 좋았다'라고 하셨는데, 후에는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다. 자궁수축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라고 하셨다.


 3회 이상의 유산이 발생할 확률은 약 1%라고 하는데, 이런 걸로 1%가 될 필욘 없는데 정말.

연속 3회 유산은 0.34%라고 하고, 이런 수치를 남편에게 읊어주면 항상 그런 거 보지 말라고 한다.

얼마나 대단한 아이가 오려고 이러나.




  폭풍 같은 한 해를 지나며, 우리 부부의 마음이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모른다.

우리는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더욱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되었다. 신앙도 얼마간 자란 것 같다.

이제 우리 남편이 능숙하게 자기 전에 기도를 해주고, 시험관 시술 중에 밖에서 열심히 기도도 한다.

한창 마음이 힘들 때는 밤마다 성경을 읽어주며 나를 재워줬다.


  '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안 들어주셔?'라고 내 말문을 막히게도 하지만 (깊고 깊은 신앙의 영역)

내가 '오빠, 진짜 이번에는 왜 유산이 됐을까?' 물으면 '그건 하나님만이 아셔'라고 답한다.


  나의 난임의 여정이, 시험관 시술의 여정이, 

다정하고 사려 깊은 남편과 함께 해서 정말로 별 것도 아니다. 


  힘든 때가 있지만 괴로워서 까무러칠 정도는 아니고, 벌써 쓴 돈이 이천만 원이 넘는 듯 하지만, 돈 걱정 없이 시험관 시술을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가족과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과 사랑이 있어서 뚜벅뚜벅 걸어 나갈 수 있어서, 와중에 행복과 감사를 풍성히 느낄 수 있어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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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의 명대사가 작년 나의 마음을 위로해줬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서 마음을 위로를 받는다는 걸 처음 느껴봤다.


  이선균(박동훈)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이유(이지안)에게 해주는 말 '옛날 일.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이 여정도 조금만 지나 보면 아무것도 아니겠지.



  서른다섯의 봄, 다소 거칠었던 서른 넷을 갈무리하기 위해 적어두는 글을 마치며.

  서른여섯의 봄은 더욱 찬란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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