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가까워져 온다. 바야흐로 보고서의 계절이다. 올해 한 일에 대해서 성과 보고서를 쓰고, 평가를 받는다. 원래 의도대로라면 지난 일 년간 얼마나 사업을 잘 꾸렸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직원들은 이 시기에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한 일보다 한 일을 ‘있어 보이게’ 만드는 데 애를 쓴다.
있어빌리티.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있어 보인다’는 표현과 능력이라는 뜻을 가진 영단어 ‘ability’를 합쳐 만든 신조어다. 실상은 별거 없지만 뭔가 있어 보이게 자신을 잘 포장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오, 좋아 보이는데?'처럼 긍정의 의미로 쓰일 때도 있지만, 겉모습을 과시하는 풍조를 꼬집을 때 쓰는 표현이기도 하다.
한때 나도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화려하고 부풀어진 수식어구보다 담백하고 간결한 문장이 와닿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만의 생각이었고, 평가의 세계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모두가 차려입은 곳에서 수수한 차림은 초라해 보일 뿐이었다.
유명무실한 사업이 있어 보이는 문구를 덕지덕지 붙이고는 평가 최고점을 받은 날, 나도 내 신념은 접고 대세를 따르기로 했다. 있어빌리티에 초점을 맞췄다. '이건 뻥 아닌가요?' 비난했던 문장들을 모아다가 조용히 보고서에 담아냈다. 덕분에 좋은 사업이라고 극찬을 받았다.
*
최근 남편 회사에서 행사를 기획했다. 그 행사에는 학생들이 참여하는 코너도 있었다. 방송 매체 기자들도 오고, 고위직의 사람들도 왔다고 했다. 학생들이 꾸린 부스들은 차이가 있었겠지만, 모두가 최선을 다해 공간을 꾸미고 채웠다. 일부 학생들은 자신들이 만든 부스를 적극적으로 알렸다. '간단하게 설명해 드릴게요', '투표 한 번만 참여해 주시겠어요?'
하지만 여러 부스 중에서도 한 부스에만 사람들이 확 몰렸다고 했다. 강렬한 문구, 눈에 튀는 퍼포먼스가 주를 이루는 코너였다. 말 그대로 있어 보이는 부스. 대부분 카메라는 그 부스를 찍고, 관계자들의 단체 사진을 찍은 뒤 우수수 빠져나갔다. 그 이야기를 듣는 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부스에서 동떨어져 부러움과 허탈함으로 서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 부스의 기획이 참신했다고 볼 수도 있다. 마케팅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역설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본질을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태도는 문제가 있다. 마치 선물 상자 안에 들어있는 선물에는 관심이 없고, 예쁜 포장지와 리본이 묶인 선물 상자에 환호하는 것만 같았다. 과연 그 행사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무엇을 보고, 느끼고, 배웠을까.
*
만약 내가 그 행사에 참석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 봤다. 다들 눈에 튀는 부스만 주목했을 때, 나는 다른 부스들도 골고루 둘러볼 것이다. 어떤 내용이 담겼나 꼼꼼히 살펴보고, 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기획했는지 들어볼 것이다. 그 안에 담겨있는 진심과 노력을 들여다볼 것이다. 나는 다른 참석자들과 달리 행동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쓴 보고서를 떠올리면 ‘과연 내가 그 참석자들과 달랐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내용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하지만, 외면과 결과를 무시할 수 없다. 솔직히 결과가 좋으면 내용도, 과정도 미화되는 게 현실이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 만한 기사를 위해, 효율적인 시간 활용을 위해 나 또한 그 부스로만 발길을 향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있어빌리티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대신, 항상 있어빌리티에 얽매여 있진 않겠다고 소심하게 다짐해 본다. 언젠가 모두가 그 굴레를 쓰고 있을 때, 나만큼은 그 굴레를 확 던져버릴 순간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