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소중한 것을 상실하였을 때
“엄마, 여기로 나랑 나경이가 나왔지? 많이 아팠지?”
요즘 부쩍 병원놀이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배를 치료해준답시고 나를 침대에 눕히더니 갑작스레 팬티를 밑으로 내려 수술부위를 작은 손가락으로 만지며 묻는다.
“그럼, 당연히 아팠지. 엄마가 되는 건 쉬운 게 아니니까.”
나도 구태여 수술부위를 확인해본지 오래되어 지금은 얼마나 아물었는지 궁금하여 상체를 일으켜 수술부위에 손가락을 대 보았다.
“엄마, 근데 배 속에 또 아기 있어? 또 엄마될 거야?”
딸아이의 악의 없는 물음이 운동하라고 등 떠미는 아들보다 더 무섭다.
“엄마가 또 아기 낳았으면 좋겠어? 나경이 동생 갖고 싶어? 언니 할래?”
나는 똥만 찬 배를 마치 소중한 생명이 들은 것처럼 살살 어루만지며 딸에게 묻는다.
“아니, 안 돼. 동생은 나경이 하나면 돼. 나 엄마 임신하는 거 싫어. 동생 또 생기는 거 싫어.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하지 마. 나 그 말 싫어.”
격정적으로 진솔한 대답을 하는 아들을 보며 빈말로도 셋째 얘기는 하지 않기로. 그 대신 운동이나 열심히 하는 걸로.
그해 가을 나는 몹시도 춥고 아팠다.
간절히 기다렸던 둘째가 늦지 않게 내게 와줬고, 너무도 일찍 나를 떠났다. 작은 생명과 짧았던 만남 뒤 이별의 아픔은 세차지 않으나 종일 내려 땅을 적시는 러시아의 가을비처럼 시간이 더해질수록 내 마음을 어두운 곳으로 완전히 끌어내렸다. 몸도 마음도 더는 떨어질 곳이 없는 나락으로 한없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 해가 아주 처량하게 끝나버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잠시 한국으로 돌아간 나는 부모님의 따뜻한 보살핌에 서서히 기력을 회복했고, 같은 아픔을 경험한 친구들과 눈물을 나누며 한 해의 끝을 이렇게 허탈하게 마무리 지을 수 없겠다는 의지가 솟아났다. 그리고 꼴도 보기 싫었던, 마치 이것 때문에 배 속의 작은 생명을 지키지 못했던 것만 같은 죄책감에 사로잡혔던 단편소설 초고를 꺼냈다.
매년 한 편씩 새로운 단편소설을 투고하기로 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여름부터 첫째의 낮잠 시간을 틈타 조금씩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썼던 소설이었다. 둘째 임신 사실을 알고도 마감일이 두 달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잠을 줄여가며 소설을 썼다. 유산이 되고 나니 그러했던 행동들이 모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 이유인 것 같아 괴로웠다. 그 소설을 꺼내어 손보는 일이 회복의 나날 전부가 되었다. 퇴고를 거듭할수록 등단과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한 해 동안 내가 쓰고자 했던 무언가를 작은 세상 속에 살아 숨 쉬는 인물들의 이야기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비록 현실에서는 소중한 생명을 놓치고 말았지만, 나의 소설 속에서는 주인공의 모습이 선명해지는 것을 보며 풀죽어 있던 마음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십이월의 코끝 시린 첫 번째 수요일 아침 신문사에 소설을 부쳤다. 우체국을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울컥 눈물이 났다. 졸음을 삼키며 소설을 썼던 시월의 가을날이 원망스럽고도 미안하고 고마워서.
매일 아침과 점심으로 함께 산책하던 일로나에게는 숨길 마음도, 숨길 수 있는 것도 없을 정도로 서로의 그림자와 같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한글날이었다. 생리예정일이 한참 지났는데도 기별이 없어 일로나와 함께 약국에 들려 임신 테스트기를 샀다. 그러한 까닭에 다음 날 아침 일로나는 내 임신 소식을 가장 먼저 알게 되었다. 그날 저녁 산책에서 그녀는 내게 손수 만든 분홍색 코르사주를 내밀었다.
“너와 너의 딸을 위하여! 임신 축하해.”
둘째는 딸이길 소망하는 내게 주는 일로나의 어여쁜 선물이었다.
첫째 임신 때 거의 토마토로 임신 기간을 버텼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입덧을 지독하게 하였다. 만삭이 되어 한국에 들어갔을 때 내 얼굴을 보자마자 엄마가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한 손으로는 곧 있으면 터질 것 같이 둥그렇고 단단해진 딸의 배를, 다른 한 손으로는 광대뼈가 도드라진 딸의 얼굴을 쓸어보고 엄마는 계속 울기만 했다. 둘째 임신을 듣자마자 엄마는 당장 당신의 비행기 표를 알아봐 달라 하였다. 그리하여 이틀 후면 임신한 딸을 위해 냉면과 쫄면, 오징어가 가득한 가방을 꾸린 친정 엄마가 러시아에 오기로 되어 있었다.
일로나와 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놀이터 산책을 하였다. 동네의 여러 놀이터 중에 시우와 료샤가 가장 좋아하는 놀이터는 높이가 족히 3m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미끄럼틀이 있는 사거리 뒤편 놀이터였다. 아직은 그들에게 위험한 높이여서 우리 둘 중 한 명이 위에 올라가고, 나머지 한 명은 밑에서 아이를 받으며 그 미끄럼틀을 이용했다. 평소에는 내가 자주 올라갔으나 임신을 한 까닭에 이번에는 일로나가 아이들을 따라 위에 올라가고, 내가 밑에서 아이들을 기다렸다. 익숙하게 우리 넷은 그 미끄럼틀을 즐겼고, 이제 마지막이라는 말에 아이들이 동시에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다. 밑에서 쭈그리고 아이들을 받던 나는 순간적으로 아이의 무게와 속도에 몸이 기우뚱했다. 속으로 철렁했지만, 다행히 몸이 뒤로 넘어가지 않아서 가슴을 쓸어내리며 산책을 마쳤다. 그러나 그 산책을 마친 점심부터 붉은 피가 쉼 없이 흘러나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나는 황급히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남편은 헐레벌떡 나를 데리고 동네 산부인과로 향했다.
“유감이야. 일주일 전에 봤을 때만 해도 아무 이상 없이 다 좋았는데 말이야.”
의사는 오전의 산책이 문제였을 거라 하였다. 핀셋으로 집어내어 보여주는 붉은 핏덩이가 쏟아져 내린 아기집과 배아라 하였다. 나는 차마 울지도 못했다. 산책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자책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요즈음 일주일 동안 계속 새벽에 일어나 책상에 앉아 글을 썼던 행동이 모두 몸에 무리를 주었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었다.
다음 날 저녁, 일로나가 우리 집 문을 두드렸다. 손에는 직접 초콜릿을 녹여 만든 코코아가 담긴 보온병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보온병을 내려놓고 나를 보자마자 꽉 끌어안았다. 나도 흐느끼는 일로나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꼭 안았다. 우리 둘은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내며 서로의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나는 엄마를 맞이했다. 엄마는 본의 아니게 임신한 딸을 위해서가 아니라, 유산한 딸의 몸조리를 위해 러시아에 오게 되었다. 예정되었던 보름의 시간으로 나는 회복하지 못하였고, 엄마도 그러한 딸을 두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결국 엄마를 따라 한국에 들어가기로 했다. 엄마를 따라 한국에 들어와 큰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홀로 산부인과를 찾았다.
“유산 후 경과를 보러 온 거라 말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정도로 깨끗하고 좋아요. 그리고 며칠 후면 생리가 시작될 거에요. 자궁벽이 얇아진 상태거든요.”
그날의 상처를 흔적도 없이 회복한 자궁 상태에 일단 마음이 놓였다. 그러나 비어있는 자궁을 들여다보는 초음파 화면이 낯설고 쓸쓸했다. 옷을 갈아입고 초음파실을 나와 진료실 의자에 앉아 의사에게 그날의 정황과 러시아 의사 소견을 말했다. 놀랍게도 한국 의사의 의견은 그것과 전혀 달랐다. 임신 6주차의 유산은 엄마의 문제보다는 애초의 염색체 이상일 확률이 90% 이상이며, 떨어져 나온 배아의 염색체 검사를 해보지도 않고 무조건 엄마의 잘못으로 치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건강하지 않은 수정체가 더 오래 버티다 떨어져 소파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타국에서 더 힘들고 무서웠을 것이라며 자연 유산되어 이렇게 빨리 회복한 것이 다행이라며 위로를 건넸다. 그리고 이왕 한국에 왔으니 몸 잘 추스르고, 생리를 두 번 정도 한 후로 다시 노력하면 건강한 아기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말도 덧붙였다. 병원을 나와 버스를 타러 걸어 들어간 골목길에서 나는 쭈그리고 앉아 처음으로 유산에 대한 울음을 소리 내 터트렸다. 비로소 나는 마음 편히 슬퍼할 수 있었다.
그해 십이월의 끝자락 나는 당선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다음 달 나는 다시금 소중한 것을 품게 되었다. 나경이 내게 온 것이다.
***
나경아, 엄마는 네가 엄마에게 축복처럼 찾아오기 전에 한 번의 유산을 겪었단다. 단 열흘밖에 품지 못한 생명이지만, 그 열흘 동안 단 하루도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 없었어. 이곳의 가을비는 참 새침해. 여린 빗방울의 기척을 닮아 태명도 여러 의미를 담아 ‘똑똑이’로 지었지. 잠시 머물다간 똑똑이로 하여금 엄마는 다음 아기를 위한 똑똑한 엄마로 발돋움할 수 있었어. 나의 건강에 자만하지 않으며, 임신하면 첫째보다 배속의 아기를 제일로 생각할 것을 몸소 알려주고 똑똑이는 떠났지.
딸, 부디 너는 나처럼 소중한 것을 잃는 경험을 하지 않길 바랄게. 매사에 꼼꼼한 편은 아니지만, 덤벙거리는 성격도 아니어서 무언가를 잃거나 떨어트린 경험이 없는 엄마는 몹시도 소중한 것을 잃은 죄책감과 상실감에 회복이 쉽지 않았어.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평정심을 되찾기가 정말 어려웠지. 그런 엄마를 일으켜 세워준 건 다름 아닌 너였단다, 나경아. 그래서 너는 첫 만남부터 나를 살린 셈이지. 유산되었을 때 이 노래를 매일 들었어. 그해 가을의 풍경과 배경음악처럼 내 마음을 대변하는 가사가 마음을 후벼 팠거든.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편할 것 없고, 쉴 곳 없는 내 속에 네가 와줬다는 게 참 기특하고 고맙고, 미안해서 임신 초기에 이 노래를 들으며 또 많이 울었더랬지. 고마워, 나경아. 가시밖에 없던 내 나무에 예쁜 꽃을 피워줘서
Track 44.
조성모 [가시나무] 작사·작곡 하덕규 원곡 시인과촌장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픔 노래들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픔 노래들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