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ck 43. 알수 [Зимний сон]

43. 우정의 정표를 마음에 모아둘 때

by 밍구


“엄마, 엄마가 좋아하는 리비나(рябина)다. 가을이 왔나 봐."
아들은 놀이터 옆에 심겨진 나무에 촘촘히 매달린 새빨간 열매를 나뭇가지로 툭툭 건드리며 말한다.
"그러게, 리비나네. 벌써 가을이네."
나는 바닥에 떨어진 작은 리비나를 주우며 가을을 함께 호주머니에 넣는다.
"엄마, 이게 리비나야, 리비나?"
나경도 놓칠 새라 리비나를 주워 자신의 주머니에 넣기 시작한다.
"응, 우리나라 말로 마가목이라고 해. 엄마가 러시아에서 제일 좋아하는 열매야."
나는 내게 리비나를 알려준 그녀를 떠올린다. 나의 러시안, 일로나(Илона)


"같이 산책할래요?"
시우의 생일이 표시된 팔월 달력이 걸려있던 여름 날, 은발의 푸른 눈동자를 가진 일로나가 함께 산책하자고 내게 말 걸었다.
이따금 그녀를 놀이터에서 마주쳤었다. 동네 놀이터에 출근 도장을 찍는 수많은 러시아 아줌마 중 보기 드문 은발과 남자 같은 상고머리와 대비되게 발레리나처럼 얇고 긴 팔다리를 가진 그녀는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녀를 따라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왼편의 작은 샛길로 유모차 방향을 틀어 아스팔트가 놓이지 않은 좁다란 숲길로 유모차를 밀었다. 그러자 여태까지 단 한 번도 들어와 본 적 없는 울창한 숲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날 리비나를 처음 봤다.
“이게 뭐야?”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한 두 살배기 시우가 나무에 매달린 동그랗고 빨간 열매를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빨간 열매가 올망졸망 매달린 얇은 나뭇가지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다발처럼 매달린 작고 탐스러운 열매가 도무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지천이 그 열매 나무였다.
“그건 리비나야. 리-비-나-.”
일로나는 내가 잘 알아들을 수 나 게 다시 한 번 천천히 단어를 말해줬다. 그럼에도 단번에 뜻을 파악하지 못한 나는 휴대전화의 러시아어 사전을 켜서 그녀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러시아어 철자 ‘рябина’를 입력하여 다시 내게 건넸다. 마가목(馬牙木), 한국어로 번역된 단어마저 낯선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마가목? 마가목, 예쁘 단어네요. 리비나를 설탕과 함께 끓여서 마실 수도 있어요. 그걸 깜뽀뜨라고 하는데 다음에 한 번 맛보여 줄게요.”
학생식당에서 자주 마셨던 깜뽀뜨(компот)를 떠올리니 이제 이해가 갔다. 깜뽀뜨는 산딸기나 블루베리 같은 베리류 과일과 물, 설탕을 넣어 조린 천연주스였다. 진한 색상에 비해 달지 않고 맛이 조금 밍밍하였던 깜뽀뜨의 재료를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가목으로 주로 술을 담가 먹는다는 검색 결과를 보니 이 작고 빨간 열매를 입에 바로 쏙 넣고 보고 싶었다. 우리는 숲에서 두 시간가량을 함께 했고, 그날을 시작으로 우리는 매일 함께 산책하였다.


일로나를 닮아 하늘색 눈동자에 부드러운 금발의 료샤는 동그란 두상이 특히나 매력적인 아이였다. 나를 보면 침까지 흘리며 두 팔 벌려 성큼성큼 내게 걸어와 안기는 료샤를 나는 무척 예뻐했다. 그에 반해 일로나가 시우 곁에라도 가면 시우는 알로나의 푸른 눈이 무서운지 울고 말았다.
매번 숲과 동네 놀이터를 산책하던 우리는 기드라 호수로 산책을 간 적이 있다. 함께 먹을 간식으로 바나나 네 개와 물병, 돗자리, 그리고 사진기를 챙겨 집을 나섰다. 저멀리 마을 어귀에서 일로나가 료샤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기다려준다는 것,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한 곳을 향해 걷는다는 것, 한국이었다면 너무나 사소해서 부러 말할 가치도 없는 타인의 행동에 나는 고개를 떨구었다.
'여긴 러시아니까 혼자가 익숙해. 한국에 가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친구들 만나니까 여기서만큼은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해.'
어느 정도는 진심이었지만, 그보다 더 많이 내 마음을 합리화하여 규정했단 사실을 일로나를 향한 나 자신의 가벼운 발걸음을 통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로나로 하여금 타인을 향한 그리움이 되살아났다. 항상 단둘이 했던 호수에 넷이 함께했던 날은 내게 잊을 수 없는 달콤한 꿈이었다. 시우보다 다섯 개월 어린 료샤는 시우의 모든 것을 모방하고 그와 함께하고 싶어 하지만, 시우는 료샤가 여간 귀찮은 모양인지 자꾸 저만치 동떨어져 놀려고 한다. 그런 시우를 보니 시우에게도 료샤가 생겨 참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든다. 엄마가 아닌 다른 누구와 산책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시우에게 아직 친구는 낯선 존재임이 당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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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따지고 보면 나는 하루에 울 신랑보다 일로나랑 있는 시간이 더 많아. 얘기도 더 많이 나누고."
엄마와의 전화에서 무심코 한 말을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곱씹어 본다.
그녀가 내게 함께 걷자고 말했던 여름날로부터 우리 넷은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하게 익어갔다. 일로나와 눈이 마주치기만 해도 내 뒤로 숨거나 울어버리던 시우가 나대신 일로나의 손을 붙잡고 함께 산책하기 이르렀다. 서로에게 익숙해진다는 것, 길들여진다는 것의 사사로운 감정이 서로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다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번지는 걸 일로나 덕분에 학창시절 이후로 다시 참되게 느꼈다. 기드라 산책 이후로 일로나와 나, 료샤와 시우는 벗이 되어가고 있었다.
처음에 나는 나의 형편없는 러시아어 실력 때문에 내가 일로나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을까 걱정했고 의심했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이 오히려 마음을 더 여실하게 표현토록 해줄 수 있는 특급 장치가 되었다. 꾸밈이나 수사 없이 느낀 그대로 툭툭 끊어내듯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히려 더 순수하고 당돌하게 일로나와 나의 거리를 좁혀주었다. '아' 다르고 '어' 다른 어법에서 비롯되는 오해가 생길 여지도 없었다. 러시아어 실력이 유창하지 못하여 필요 이상의 말을 하지 않게 되다 보니 매일 밤 일기를 쓸 때면 오늘 하루 나눴던 대화의 주제들이 선명히 모두 떠올랐다. 또한, SNS로 나눈 대화에서 모르는 단어를 단어장에 적으며 공부하니까 그날 오고 갔던 대화를 꼭꼭 씹어 다시 마음속에 되새기는 기분마저 들었다. 한국인 친구와의 교제와는 전혀 다른 소통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대신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내게 생겼다.


"뇨사, 뇨사."
처음에는 료샤를 귀찮아하고, 도망갔던 시우가 이제는 료샤의 손을 잡아주고, 사탕을 나눠준다. 료샤는 변함없이 시우에게 달려오며, 그의 모든 행동을 따라 하며 즐거워한다. 일로나도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표정과 몸짓으로 내게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해온다. 나도 이제 자연스럽게 일로나의 어깨를 토닥이기도 하고, 그녀가 이해할 때까지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농담을 시도해 보기도 한다.


일로나와 나는 오전에는 숲으로, 오후에는 기차역과 역전 시장으로 매일 하루에 두 번 함께 가을길을 산책했다. 그 시절 우리는 매일 일곱 시간가량을 함께 산책했다. 한 달 사이 숲은 초록빛 옷을 벗어 던지고 노란빛 옷으로 갈아입은 채 차가워진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쓰러진 나무 세 그루가 아이들의 놀이터처럼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곳에 유모차를 세웠다. 유모차에서 내린 시우와 료샤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빨갛고 작은 열매가 방울 다발처럼 열려있는 마가목 나무로 향했다.
“이거 뭐야?”
시우는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으로 내게 묻길래 나는 이미 알면서도 매번 묻는 시우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마가목이라 대답했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내 대답에도 시우는 재차 물었다. 원하는 대답이 아니란 뜻이었다.
“리비나.”
그때 일로나가 다가와 마가목 열매 한 뭉텅이를 시우의 손에 올려주며 러시아어로 답해줬다. 그러자 시우가 일로나를 향해 씨익 웃으며 마가목 뭉텅이를 흔들고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쓰러진 나무에 양발을 벌리고 앉은 두 꼬마가 마가목 열매를 하나씩 떼어내어 나무의 갈라진 틈새 사이로 사이좋게 집어넣으며 웃는다. 열매 뭉텅이가 빈 가지로 바뀌자 시우가 일어나 일로나의 손을 잡아 마가목 나무로 이끌었다.
“시우야, 엄마가 따줄게. 일로나 아줌마는 료샤 봐야지.”
나의 말에 시우는 도리질을 치며 일로나를 더 세게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긴다. 일로나는 못 이기는 척 시우의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마가목 앞에 서서 열매 한 뭉텅이를 꺾어 시우의 손에 쥐어 준다. 어느 나무의 꼭대기에선가 딱따구리가 나무를 찧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가목 열매를 든 네 사람은 딱따구리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지만, 딱따구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딱딱딱딱-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나무 찧는 소리가 숲 속과 우리의 마음속에 공명한다.


***

나경아, 너도 일로나 아줌마 알지? 엄마의 러시아에서 일로나는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란다. 그녀와 함께 했기에 옛날 동네가 엄마에게는 달콤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단꿈과도 같은 장소이자 시간이지.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싶을 정도로 황홀함을 그 순간에도 느끼지만, 차마 한 번 깨고 나면 다시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우리는 함께 사계절을 겪었고, 각 계절의 추억을 입혀 서로의 아이가 한 뼘씩 커나가는 걸 함께 지켜보았지. 지금은 엄마와 일로나가 멀리 떨어져 살지만, 가을이면 지천으로 열리는 마가목을 보며 늘 엄마는 일로나를 그리고, 그 시절의 우리를 추억한단다. 리비나는 엄마에게 우정의 열매지.
딸아, 너도 텔레파시가 통하는 친구를 만나 꿈같은 시절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구나. 어린시절에 만난 친구와의 추억은 그게 그렇게 귀한 것인 걸 모르고 맞이하길 마련이야.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아무 이해관계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울뿐더러 그 친구와 인생의 소중한 시절을 함께 걸을 때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 그래서 일로나는 시작부터 그리운 사람이 되고 말았어. 너도 우정의 정표를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나길 바랄게. 이왕이면 무뚝뚝한 표정 뒤에 따뜻한 마음을 감춰둔 러시안 친구가 네게도 꼭 함께하길



Track 43.

알수(Алсу) [Зимний сон (겨울의 꿈)]
작사 작곡 Александр Шевченко

Звёзды поднимаются выше,
Свет уже не сводит с ума,
Если ты меня не услышишь,
Значит, наступила зима.
Небо, загрустив, наклонилось,
В сумерки укутав дома,
Больше ничего не случилось,
Просто наступила зима.

В тот день, когда ты мне приснился,
Я всё придумала сама,
На землю тихо опустилась зима, зима.
Я для тебя не погасила
Свет в одиноком окне,
Как жаль, что это всё приснилось мне.

В сны мои луна окунулась,
Ветер превратила в туман,
Если я к тебе не вернулась,
Значит, наступила зима.
Может, помешали метели,
Может, предрассветный обман,
Помнишь, мы с тобою хотели,
Чтобы наступила зима.

В тот день, когда ты мне приснился,
Я всё придумала сама,
На землю тихо опустилась зима, зима.
Я для тебя не погасила
Свет в одиноком окне,
Как жаль, что это всё приснилось мне.

Голос тихий таинственный, где ты,
Милый, единственный сон мой.
Вьюгой белою снежною стану,
Самою нежною, сон мой.

В тот день, когда ты мне приснился,
Я всё придумала сама,
На землю тихо опустилась зима, зима.
Я для тебя не погасила
Свет в одиноком окне,
Как жаль, что это всё приснилось мн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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