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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디짱 Nov 15. 2020

그녀가 아이를 낳던 날

2월이래도 칼바람이 불었다. 마음까지 차가운 날이었다. 옆에는 4살 딸이 배고프다며 울었다. 가게 저 안짝에 딸린 조그마한 방. 보일러도 안 들어오는 차가운 방바닥. 내 할머니 옥련은 이를 악물고 산통을 느꼈다. 옆 셋방의 아줌마가 물과 가위를 데워 준비했다. 조산원도 아닌 집에서 그렇게 둘째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산후조리랄것도 없었다. 모두가 가난한 시대였다. 옥련은 애 낳은 다음날에 쭈구려 앉아 밭을 메지 않아 다행인 도시의 아낙이었다. 차라리 감사했다. 그렇게 옥련은 딸 아들 딸 딸 아들을 낳았다. 막둥이 아들을 낳기 전, 옥련이 세번째 딸을 낳았을때 밥을 먹지 못했다. 위에 아들이 있었음에도 그랬다. 아들 못 낳은 죄인이란 마음이 들어서였다. 조리를 해주러 온 옥련의 엄마는 사위에게 "양서방, 그래도 밥을 좀 먹어야 회복을 할터인디.. "라며 위로인지 타박인지 모를 말을 건넸다. 남편인 양서방은 "밥이 넘어가게 생겼습니까"라며 걱정인지 타박인지 모를 말을 답했다. 아들이 있어도 아들을 바라는 세상이었다.


얼굴도 못 본 남자와 결혼을 했고, 그 남자는 결혼하자마자 전쟁에 나갔다. 옥련은 3년동안 남편도 없는 시집에서 시집살이를 했다. 시부모의 밥을 차렸고 윗동서의 괴롭힘을 참았다. 18살에 결혼한 옥련은 이제 88살이 됐다. 옥련은 다섯을 낳아 길렀고 옥련의 딸도 셋을 낳아 길렀다. 그런데 옥련의 딸의 딸, 그러니까 손녀는 결혼을 했는데도 4년째 애 소식이 없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결혼 언제하는지, 애 언제 낳는지 묻는것을 싫어한다지. 묻지 않았다. 


그런 손녀가 임신을 했다고 했다. 어렵게 아이를 가져 마음 놓고 좋아하지도 못하는 손녀가 안쓰러웠다. 옥련이 해줄수 있는 건 그저 맛있는 밥을 해주고, 따뜻한 방을 만들어주고, 한껏 예민해진 손녀의 심신을 '라떼는 말이야'하며 안정시켜 주는 것이었다. 말은 안 했지만 무척이나 기다려온 손녀의 임신. 오래 살아서 손녀의 자식도 보겠구나. 하던 옥련이었다. 


일을 다니는 손녀는 산부인과 다닐 시간도 없어 매번 출근 전 병원에 들리곤 했다. 산부인과와 집이 가까워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산부인과를 다녀온 손녀는 꼭 옥련에게 전화를 했다. "할머니, 별일 없고 아기 잘 크고 있대" 그런데 그 날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전화가 없었다. 뭔 일이 있나 싶어 전화를 해보고 싶었지만 바쁘게 출근한 손녀에게 전화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딸에게 전화가 왔다. 손녀가 입원을 했다한다. 산부인과에서 하혈을 했다고. 의사가 바로 입원을 하라 했다고.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손녀는 하루만에 집에 왔다. 아기가 잘못됐다고 했다. 손녀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아기를 가졌을때도, 아기가 흘렀을때도 옥련이 해줄수 있는 건 맛있는 밥과 따뜻한 방이었다. 손녀는 옥련의 집에 며칠 있겠다고 했다. 손녀는 괜찮아보이기도 했고 슬퍼보이기도 했다. 방에서 혼자 우는건지 옥련 앞에서 눈물 흘리지 않았다. 잘 먹어야 회복이 빠르다고 많이 먹으라 했는데 손녀는 영 입맛이 없어보였다. 옥련은 손녀의 입맛이 돌아오길 바라며 무짠지나물을 만들었다. 가을 무를 채썰어 멸치다시 국물에 자작하게 조린, 손녀가 잘 먹는 반찬이었다. 몇 술 뜨던 손녀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옥련도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손녀는 울면서도 할머니 미안, 할머니 미안 말했다. 둘이 부둥켜안고 엉엉 울던 밤. 옥련은 부처님께 빌었다. 우리 손녀, 이제는 울 일 없게 해주세요. 부처님, 부처님, 부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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