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상실
어렸을 적 부터 줄곧 아파트에서만 살았다. 지금은 단독주택에 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곧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우리집 주변에는 주인잃은 고양이가 많고, 편의점이 아닌 동네 슈퍼가 있고, 아직도 철도길이 있다. 우리집 주변을 제외한 다른 동네들은 이미 재개발이 확정되어 아파트가 지어지고 있는 곳도 있고, 이주가 시작되어 철거를 준비하는 곳도 있다.
지금까지 재개발은 나의 생활과는 무관했던 단어였고, 뉴스를 통해서만 들을 수 있었던 생소한 단어였다. 누군가에게 재개발은 로또일수도,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랫동안 가꿨던 내 집, 어린시절을 불러일으키는 추억이 깃든 동네의 존재는 분명, 어떤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 을만큼 소중하다.
누구나 추억이 있고, 그 추억은 내가 기억하고 싶다고 해서 선명하게 생각나는 건 아닌 것 같다. 추억이 깃든 물건이나 또는 장소와 함께 있을 때, 그 추억은 오롯이 회상된다. 지금은 듣기 어려운 오래된 테이프, 비디오 그리고 읽지 않아도 보관하는 어렸을 적 편지들. 사실은 쓸모도 없고, 딱히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책상서랍 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건 아마도 그 이유 때문일것 같다.
재개발은 주거 환경이 낙후된 지역에 주택을 신축함으로써 주거 및 도시 환경을 재정비 하는 사업이라고들 한다. 주거환경이 낙후되었다는 건, 주택 외관의 모습뿐 만이 아닌 주변시설, 환경이 좋지 않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주택의 외관이 오래되고 낡은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주택을 허물어 비싼 아파트를 짓는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아마도 유명한 브랜드의 아파트가 들어서면 주변의 상권이 좋아질것이라는 생각 때문인 것 같다.
지금, 우리동네에는 다양한 단독주택들이 많다. 한 눈에 봐도 제 각기 다른 추억을 가진 집들이 많다. 요새는 보기 드문 하늘색 철제문 장식, 독특한 건물 외벽. 그리고 동네를 지키는 이웃 할머니들. 골목 골목 집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동네.
하지만 사람들은 옛날의 것, 오래되고 낡은 것을 자꾸만 부수고 새 것을 지으려고만 한다. 쉴 새 없이 오래된 것을 새것으로 교체 중이다.
그리고 아이러니 하게도, 옛 것을 보기위해 외국 여기저기를 여행하고 빈티지 물건들을 찾는다. 뉴욕과 홍콩같은 도시도 좋지만, 옛 건물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럽을 여행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 같다.
멀리 유럽이 아니더라도 서촌과 북촌은 주말만 되면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이탈리아를 여행한 적이 있다. 낡고 허름한집 그리고 오래된 건물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있었고 그런 것들이 모여 거리를 만들고 문화가 생긴 공간이였다. 건물은 오래되어도,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했고 현대적이였다. 그때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유럽은 건축의 외관 보다는 내부를 중심으로 공사를 한다고들 한다.
물론 그들도 외관이 낡아 불편한 점이 많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가진 문화나 추억을 지키려고 하는 것 처럼 보였다.
우리집도 신혼집 살림을 위해 6개월 전 리모델링을 했었다. 사실 이 집은 남편이 중학교 시절을 함께 보낸 공간이다. 그래서 남편의 어렸을 적 사진을 보면 과거의 우리집이 여기저기 보인다. 물론 내부는 많이 달라졌지만 외관은 거의 동일하다. 집이 오래되어 느끼는 불편한점도 있지만, 남편의 어린 시절과 현재를 같이 추억할 수 있는 공간에서 산다는 건 나에게는 조금 특별한 경험이자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내가 생각했던 재개발은 단순히 살던 터전을 잃는 것과 보상금 문제가 다였다. 현실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옛 건물을 부수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동안 우리의 아련했던 과거의 기록들과 현재의 추억까지 함께 사라진다는 게 가슴 한 켠으로는 아프고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