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 아빠 덕분입니다.

제일 감사한 우리 아빠

by 밝을 여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인생의 가장 큰 터닝포인트라고 하면 아빠가 아프시기 전과 후로 나뉠 수 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빠가 아프시고 난 후부터 나에게 급격한 변화들이 있었다.

생각과 감정들의 변화.


그때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렇다.


오랜 시간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서 생긴 깨달음이 아니라, 어느 순간 눈이 번쩍 뜨이고,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그런 한순간의 깨달음.

깨달음이라고 하니 무언가 거창해 보이지만, 내가 느낀 깨달음은 그동안 살면서 내가 느꼈던 감정들, 수많은 생각들, 주로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자신감 없던 생각들이 어느 한순간, 정말 하루아침에 암막이 걷히고 밝은 빛으로 나를 밝혀주는 그런 긍정적인 깨달음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때를 생각하면 마치 누군가 나를 조정한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뭔가에 씌었었나 하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어쩌면 쌍둥이 언니 말마따나 영화 라따뚜이에서 요리 능력자 생쥐 레미가 재능 없는 수습생 링귀니를 조정해서 멋진 요리를 만드는 것처럼, 나도 어떤 누군가가(?) 나를 조정했을 수도.




아빠가 아프시고 나서 내 인생은 전개가 아주 빠르고 박진감 넘치는 한 편의 영화처럼 새로운 인생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겉으로는 늘 똑같은 일상이고 변화도 없어서 아주 가까운 남편조차 나의 심적인 변화에 대해 잘 인지하지는 못하겠지만, 나 스스로는 확실히 느낄 수 있다.


물론 난 오랜 시간 도를 닦고 마음 수양에 집중한 사람이 아니라서 지금도 여전히 순간순간 짜증이 날 때도 있고, 몸과 마음이 지칠 때도 많다. 하지만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는 예전과는 다르게 부정적인 감정들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화가 나더라도 그때 잠깐 뿐이고, 금방 훌훌 털어버리게 된다. 게다가 화가 난 이후에는 곧바로 나 자신을 객관화해서 들여다보기까지 한다.


예전에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피해를 봤거나, 무언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꼭 어떻게든 대응을 했었다. 게다가 대응한 후에도 화가 쉽게 가라앉지 않아 오랫동안 두고두고 마음에 쌓아두었었다.


나를 거의 20년 가까이 지켜봐 온 남편도 그런 나의 성향을 잘 알고 있다. 가족, 가까운 지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늘 마음속에 날카로움이 있다는 것을.


그렇다 보니 집이 아닌 밖을 나가게 되면, 가족이 아닌 낯선 모든 사람들은 어느 순간 나에게 잠재적으로는 아군 아닌 적군이 되어있었다.


물론 지금도 아주 모든 게 다 바뀌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변화가 있음을, 그리고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음을 나 스스로는 분명 느낄 수 있다.




파란 하늘이 그림같이 예뻤던 어느 주말, 아이들과 동물원에 가서 한참을 놀다가 음료도 마실 겸 좀 쉬려고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우리 집 말없는 남편이 갑자기 나를 보더니 씩 웃으며 한마디 하였다.


"아까 우리 동물원 입장할 때, 그 직원이 여보한테 '입장권 QR코드 밑으로 갖다 대고요! 그리고 마스크 똑바로 쓰고요! '이랬잖아. 흐흐. "


"아 그때? 아 진짜.. 한 대 때릴까? 흐흐"


나도 웃으면서 남편 얘기에 농담으로 맞받아치긴 했지만, 사실 속으로 조금 놀랐다. 그 찰나의 순간을 남편이 기억하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나는 평소에 말투에도 조금은 민감한 편이라 동물원 입장할 때 그 무심하면서도 딱딱하고 단호한 직원의 말투에 순간 당황은 했었다. 사실 마스크도 똑바로 써야 될 정도도 아니었다. 예전의 나 같았으면 어떻게든 한마디 꼭 하고 지나갔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괜찮았다. 별거 아니었다. 오히려 하루 종일 서서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상대하느라 저 직원은 얼마나 피곤할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아마도 남편은 버럭 하면서 한마디 하는 나의 모습을 예상했을 텐데 그러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아무렇지 않게 흘려 넘긴 달라진 나의 모습에 조금은 놀라서 뜬금없이 얘기를 꺼낸 것일 거다.


눈에 확 띄는 겉모습의 변화가 아니라서 나 이외에는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지만, 확실히 예전 하고는 달라진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모습에 나 스스로도 놀랄 때가 많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우리 곁에 있었고 또 언제든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었던 아빠가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하늘나라로 가시고 나서 나의 내면의 변화는 더 확실해지고 뚜렷해졌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모든 것은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빠의 부재라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이 실제로 나에게 일어났고 현실이 되어버렸다. 아빠가 지금도 우리 곁에 항상 있다고 믿지만, 그래도 이제는 더 이상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이 믿을 수 없는 사실 때문에 한동안은 혼란스러웠지만, 아빠가 아프시고 난 후부터 나의 내면의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에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는 데 그리 오랜 시간 걸리지 않았다. 마냥 슬퍼할 수도 있을 이 현실을 오히려 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어쩌면 그런 생각도 든다.

혹시 이 모든 것을 아빠가 계획하신 것은 아닐까 하고.

갑자기 떠나게 되면 가족들이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절망에 빠질까 봐 그러지 말라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남은 인생 더 의미 있게 살라고.

영화 라따뚜이처럼 아빠가 나를 조정한 것은 아닐까.




조용한 이 밤, 아빠가 생각난다.

그리고 나는 오래간만에 노트를 꺼내 감사일기를 적는다.



'제일 감사한 우리 아빠!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다 아빠 덕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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