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복강녕(壽福康寧)

아빠의 메시지

by 밝을 여름


아빠의 첫제사라 지난주에 본가에 내려갔었다.

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데 만감이 교차했다.

아빠가 돌아가신 지 1년이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고, 아빠 없이 1년을 보냈다는 게 실감 나지도 않을뿐더러, 아빠 없는 집에서 엄마 혼자 1년을 지내셨다는 게, 그저 시간이 참 빠르다는 생각만 들었다.


원래 부산 가는 길은 늘 신나고 즐거운데, 이상하게 이번만큼은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키다 보니, 마음도 괜스레 복잡해지고 아빠 생각에 뜬금없이 눈물이 나기도 했다.

해질녘 노을을 바라보니 더 센티해져서 감성에 젖었던 것 같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본가에 도착해있었다.


복잡했던 감정도 잠시 뿐, 막상 엄마 얼굴을 보니 싹 다 잊히고 그저 마냥 기분이 좋았다. 엄마도 우리를 보자마자 기분이 좋아지셔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너희 아빠 첫제사라고 양숙이가 종류별로 과일 준비해서 집으로 배달 보냈더라.

그리고 말분이는 제사 때 쓰라며 비싼 큰 생선을 사서 주는데, 주면서 눈물까지 흘리더라.

캔 형님도 생선 사서 보내주고, 또 다른 사람들은 제사 때 쓰라며 봉투에 돈까지 넣어서 주네."


엄마 말을 듣는데,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제사를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신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다들 첫제사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것저것 신경 써 주신 것 같아 더욱더 고맙고 감사했다.

모두 다 엄마 아빠 덕이고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 제사 날, 우리 집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제사는 밤에 지내지만 나물이고 생선이며, 손이 많이 가는 음식들이 많으니 엄마는 허리 한번 펼 겨를 없이 주방에서 정성스레 음식을 준비하셨다.


그렇게 제사 상이 거의 다 차려질 때쯤, 나는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다가 방문 밑에 중국어가 적혀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마침 큰언니가 가져온 대만 초콜릿 과자가 있어서 나는 그 초콜릿에 들어있던 포장지인 줄 알고 집어 들었는데, 한자를 읽고 밑을 보니 아빠 얼굴이 있었다.


아빠 얼굴, 아빠 사진이라는 걸 확인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방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최근에 아빠 물건들을 다 정리해서 방에 보이는 물건이라고는 내 짐가방이랑 입고 온 옷가지들뿐이었는데, 또 예전에 아빠가 여행 다닐 때 찍은 사진은 거의 다 봤었는데, 그때는 이런 스타일의 사진은 없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이 사진이 나온 건지...

사진 크기도 너무 작고, 또 선명하지도 않고, 재질도 종이라 하마터면 아빠 사진인 줄도 모르고 찢어버릴 뻔했는데, 그랬으면 정말 큰일 날뻔했다.


이건 분명 아빠가 보낸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기막힌 타이밍이지 않은가.

1년 동안 보이지 않던, 아니 난생처음 보는 아빠 사진이 아빠의 첫 제삿날, 그것도 제사 지낼 그 시간에 방바닥에 떨어져 있다는 게 너무 기이하지 않은가.

놀란 마음을 미처 진정시키지 못한 채, 곧바로 엄마한테 얘기를 했다. 엄마도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으시며 조용히 그 종이를 제사상 위에 올려놓으라고 했다.


형상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여기 이 자리에 와있다는 걸 우리한테 알려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기념사진에 적혀있는 한자를 자세히 읽어보니, 아빠가 보낸 메시지라는 생각이, 아니 확신이 들었다.



수복강녕(壽福康寧)
: 오래 살고 복을 누리며 건강하고 평안함.



이건 분명 아빠가 우리 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 전하는 말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그날 밤, 나는 오래간만에 꿈속에서 아빠를 만났다.

꿈속에서 아빠는 아주 해맑은 표정으로 밝게 웃으시며 나를 꼭 안아주셨다. 뼈가 으스러지도록 꼭 안아주시는 데, 꿈속이지만 오래간만에 만난 반가움이 몇 배로 느껴졌다. 마치 꼭 현실 같아서 온 몸이 떨리고 가슴이 벅차기까지 했다. 겨우 입 밖으로 아빠하고 부르려고 하는데, 꿈속 아빠는 마치 몰래 온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보며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하셨다.


내가 기억하는 꿈 내용은 여기까지이지만, 꿈속 느낌이 너무나 생생해서 꿈인지, 현실인지 혼동이 될 정도로 얼떨떨했다.


아빠 꿈을 자주 꾸지는 않지만, 이번 꿈은 마치 꿈을 꾼 것 같지 않고, 실제로 아빠를 만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꿈속 세상은 아무도 알 수 없으니, 어쩌면 정말로 실제로 아빠를 만난 것일 수도. 그리고 깨어났을 땐, 내 기억을 꿈꾼 것처럼 만든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빠 꿈을 꾸고 나니, 아빠에 대한 걱정은 원래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더 할 필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여기에서보다 더 자유로워 보였고, 정말 환하고 해맑으셨으며, 아빠가 계신 세상은, 세계는 분명 더 좋은 곳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빠가 보낸 두 가지 시그널을 다 맞게 받아들인 것 같아 괜스레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빠가 방문 밑에 떨어뜨린 기념사진 속 '수복강녕(壽福康寧)'사자성어처럼,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고 편안하게 복 받으며 오래오래 살겠다고, 그리고 꿈속에서 잘 지내는 모습 보여 주셨으니 아빠 생각하며 슬픈 생각은 하지 않겠다고 나도 마음속으로 아빠에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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