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의 '안전하다는 착각'
새벽 5시, 알람보다 먼저 울리는 라디오 소리에 눈을 뜬다.
아나운서의 단조로운 목소리가 교통사고 사망자 통계를 전한다. "지난해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2,916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5.7명입니다." 나는 무심코 침대 밑 리모컨에 손을 뻗어 볼륨을 낮춘다. 매년 반복되는 이 의 례적인 발표에서, 내가 진짜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그 뒤에 따라오는 퍼센트다. 0.0057%. 이 소수점 아래 자리들이 내 마음속 어딘가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건 아주 작은 확률이야. 너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 야.' 출근길 횡단보도를 건널 때도, 높은 건물에서 청주 시 내 풍경을 내려다볼 때도, 그 미세한 숫자들은 무의식 속에서 나를 안심시킨다. 불안은 소수점 뒤로 숨고, 안도감 이 고개를 든다.
40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나는 이런 패턴을 수없이 반복해 왔다.
항공기 사고 확률, 화재 발생률, 질병 발병률... 모든 위험은 숫자로 포장되어 전달되고, 그 숫자가 충분히 작으면 나는 마음을 놓는다. 하지만 이 아침, 라디오를 끄지 않고 끝까지 들어본다. 아나운서는 계속해서 말한다. "특히 50대 남성의 사망률이 높게 나타났으며, 안전벨트 미착용과 과속이 주요 원인으로 분석되었습니다." 갑자기 0.0057%라는 숫자가 더 이상 추상 적이지 않다. 50대 남성. 나는 2025년 현재 43세다. 7년 후면 그 통계 속 위험군에 정확히 속하게 된다.
숫자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만든 가장 효율 적인 언어다. 복잡한 현실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하고, 비 교 가능하게 만들며, 객관적 판단의 근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 언어가 우리를 보호한다는 착각은 너무나 달콤하다. 1/1,000,000의 위험은 귀에 닿는 순간 의미를 잃고, '거의 불가능'이라는 막연한 감각으로 변한다. 우리는 머 릿속에서 저 위험을 지우고 일상의 체크리스트를 이어 간다. 문득 휴대폰 알림이 울리면 잠깐 고개를 떨군 채 걷는 다. 아내가 보낸 "안전 운전하세요"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도, 방금 전 라디오에서 들었던 사망자 숫자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메시지에 하트 이모지로 답장을 보내고, 차에 시동을 건다. 안전벨트를 매는 것은 습관이고, 제한속도를 지키는 것도 습관이다. 하지만 그 습관들이 0.0057% 라는 통계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숫자가 주는 안도감은 이렇게 강력하고 일상적이다.
우리는 매일 수백 개의 숫자에 노출되며, 그중 상당수가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존재한다. 날씨 예보의 강수 확 률 30%, 항공편 지연 확률 5%, 식중독 발생률 0.2%... 이 모든 숫자들이 우리의 하루를 설계하는 데 영향을 미치 지만, 정작 그 숫자들이 어떤 전제 위에서 계산되었는지, 어떤 변수들이 배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묻지 않는 다. 몇 해 전, 나는 본사에서 실시한 안전담당자 교육에 아 시아 지역 책임자로 참여했다. 파리 본사의 글로벌 케이블 제조업체로서 우리는 세계 각국에 산재한 공장들의 안전 수준을 표준화해야 했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명확했다. '사고율 0.5% 이하 달성 및 유지.' 그 숫자는 임원 보고서 맨 앞 페이지에 굵은 글씨로 박혀 있었고, 매월 글 로벌 안전회의에서 첫 번째 안건이었다.
- 호세의 '안전하다는 착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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