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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07. 2018

나 한 개의 머릴 쓰리니

고사신편 #3

聰明的孩子,告訴你罷。 你還不知道么,我怎么地善于報仇。 你的就是我的;他也就是我。 我的魂靈上是有這么多的,人我所加的傷,我已經憎惡了我自己!
총명한 아이야, 잘 들으렴. 내가 얼마나 원수를 잘 갚는지 너는 아직 모르겠지. 너의 원수가 바로 내 원수이고, 다른 사람이 곧 나이기도 하단다. 내 영혼에는, 다른 사람과 만든 숱한 상처가 있단다. 나는 벌써부터 내 자신을 증오하고 있단다.  
<검을 벼린 이야기>


역사가 얼마나 흐르든 인간의 성정은 크게 변하지 않는가 보다. 시대가 감각을 주조하고, 감각이 시대를 바꾼다 하지만 평범한 인간을 사로잡는 건 그리 다르지 않다. 그렇지 않으면 어찌 고대의 유물이 오늘날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 일이 있을까. 고대 그리스인은 아름다운 인간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돌로 조각해 낸 인체는 여전히 빛을 발한다. 그렇다면 고대 중국인들에게는 무엇이 있을까?  


<검을 벼린 이야기(鑄劍)>는 간장과 막야라는 고대의 명검에 얽힌 이야기를 토대로 삼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 이야기. 이와 비슷한 이야기는 고대 사회에 여럿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객열전>도 그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자객열전>에는 칼로 이름을 떨친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서도 진왕 영정, 훗날 진시황이 되는 그를 암살하려 했던 형가의 이야기는 고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인상을 남겼다.  


연나라 태자 단은 자신을 욕되게 한 진왕을 죽이려 자객을 찾는다. 형가를 소개받는데 그는 진왕을 만나기 위해 번오기의 목이 필요하다 말한다. 번오기는 진나라 출신의 장수로 진왕의 미움을 받아 쫓겨난 처지였다. 그 역시 복수에 목이 마른 터, 거리낌 없이 자신의 목을 내놓는다. 형가는 날카로운 비수와 번오기의 목, 그리고 연의 지도를 들고 진왕을 만난다. 결과는 실패.  


그러나 번오기의 목을 바치는 동시에 진왕의 목을 노린 그 찰나는 후세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화상석畵像石으로 남았다. 지금 보아도 그 황급한 순간을 그린 그림이 매우 인상 깊다. 찾아보면 다양한 화상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대마다 형가의 이야기는 내내 반복되고 재생산되었을 것이다. 장이모의 영화 <영웅>은 형가의 이야기를 비롯해 간장과 막야 등의 이야기를 차용해 또 다른 복수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복수’야 말로 어느 시대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가 아닌가. 둥글둥글한 사람들만 살고, 꿈같은 시절만 이어지면 좋겠지만 사람의 삶이 어찌 그렇게 될 수 있으랴. 척지는 관계도 있기 마련이고, 풀 수 없는 문제도 생기기 마련이다. 한 지붕은 물론,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을 테다. 그러나 우리는 복수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건 문명인의 덕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 손에 피를 묻힐 일은 용납되지 않는다. 나아가 원수란 무릇 보복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 아니던가. “네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나 루쉰에게 묻는다면 복수에 대한 이야기가 사라진 것을 다르게 말할 것이다. 문명 때문도 사랑 때문도 아니다. 그건 우물쭈물 미적지근한 버릇 때문이다. 따져보면 루쉰의 진단이 맞다. 적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성정이 더 고상해진 것도 아니다. 복수라는 말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정의가 코 앞에 있기 때문도 아니다. 그저 구경꾼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반성컨데, 망설임을 너그러움이라 잘못 생각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 


주인공 미자척은 간장과 막야의 아들로 아버지의 원수, 초왕을 죽일 운명을 갖고 태어난다. 그러나 루쉰이 그려내는 그의 모습은 영 미덥지 않다. 밤마다 시끄럽게 울어대는 쥐 한 마리를 두고 한참이나 죽일지 말지 망설인다. 항아리에 빠진 쥐를 삶아 죽이겠다며 불을 때지만, 그렇게 죽는 꼴을 보지 못해 건져내 줄까 하기도 한다. 그러다 쥐가 징그러워 다시 물에 빠뜨려놓고는 나오지 못하도록 몇 차례 머리를 누르기까지 한다. 결국 다시 쥐를 꺼내지만 이미 쥐는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물밖에 나와 기운을 차리는가 했는데 미간척은 그 움직임에 놀라 쥐를 밟아 죽인다.  


미간척의 어머니는 묻는다. ‘쥐를 죽인 게냐, 아니면 살리고 있는 게냐?’ 미간척은 물론 사건의 전모를 아는 독자들도 쉽게 대답할 수 없다. 미간척은 쥐를 죽인 걸까 아니면 살린 걸까? 여섯 번이나 갈아 넣은 관술불처럼 뜨뜻미지근한 사건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쥐의 원혼은 원망할 상대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미간척이 자신을 죽인 것인지 살린 것인지 알지 못해서.  


흥미롭게도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나선 미간척도 그와 비슷한 상대를 만난다. 왕을 베어 버리겠다고 나서다 부딪힌 깡마른 소년이 그렇다. 그는 미간척과 시비가 붙는데, 미간척이 자신의 소중한 단전을 눌렀다는 게 문제였다. 정말 단전을 누른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단전을 눌러 여든 살 까지 살아야 하는 수명이 줄어든 것인지도 알 수 없다. 해결할 수도, 해결할 가치도 없는 문제를 붙잡고 늘어지는 시비를 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 ‘이러한 적을 만났으니 미간척은 정말 성을 낼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루쉰의 글을 보면 그도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 파리와 같이 앵앵거리는 이들. 차라리 물에 빠진 개는 낫다. 몽둥이를 들고 후려 치면 된다. 그러나 미간척은 나뭇가지로 물에 빠진 쥐의 머리통을 꾹꾹 눌러댈 뿐이었다.  


루쉰의 지적처럼 조심스러움이 도리어 방해가 되곤 한다. 미간척은 사람들에게 걸리지 않기 위해 조심했지만, 도리어 조심스러움에 걸려버렸다. 미간척의 걱정처럼 그가 끌러맨 날카로운 검에 사람들이 베일 수도 있었겠지만, 거꾸로 걱정뿐인 걱정에 그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의 조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그가 쥔 검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소문이 났다. 어떻게 새어나갔는지 왕을 암살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결국 미간척은 온통 새까만 사내를 따라 성에서 도망친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초왕을 죽이러 성에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원수는 접어두고 초야에 묻혀살 것인가. 그러나 또 다른 길이 있다. 새카만 사내에게 칼과 목을 맡기는 것이다. 이름은 연지오자宴之敖者, 문문향汶汶鄕 출신의 기묘한 사내에게. 루쉰은 그가 당최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혹시 그는 의로움을 좇아 초왕을 살해하는 것일까? 아니면 미간척의 상황을 동정해서 그런 것일까?  


“의협심이니 동정심이니 하는 그런 것들, 이전에는 깨끗했었지. 그러나 지금은 모두 너절한 적선의 밑천으로 변해 버렸어. 내 마음엔 네가 말하는 그런 것들이 조금도 없다. 난 그저 네 원수를 갚아 주려는 것뿐이다!”  


그저 복수만을 이야기하는 사내, 수염이며 눈썹이며 머리칼이 모두 새까만 사내. 흑암과 같은 그 사내는 루쉰의 글에서 종종 보이는 그림자와도 같은 무엇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숱한 상처를 입은, 일찌감치 자기조차 증오하는 이 사내에게는 미간척의 그런 어리숙함이 보이지 않는다. 미간척은 그의 말을 따라 스스로의 목을 베고, 그 사내에게 칼을 넘긴 뒤에야 복수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미간척의 머리를 들고 부르는 사내의 노래는 기묘하기만 하다. 섬뜩하기도 하며 애절하기도 하다. 복수와 사랑을 노래하는 저 노랫말은 대체 무엇일까. 그저 광인의 부르짖음 이라고만 할 수 있을법하다. 그의 노래는 초왕 앞에서도 이어진다. 커다란 솥을 마련해놓고 그 속에 미간척의 머리를 던져놓고 그는 노래를 부른다. 더 기묘한 것은 솥의 끓는 물과 함께 미간척의 머리가 춤을 추며 이윽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미간척과 새카만 사내가 더불어 부르는 노래. 피를 부르고 복수를 예고하는 저 노래는 강렬함으로 남는다. 


아하 오호라, 오호 오호.
사랑이여 오호라, 오호라 아호.
하나의 머리를 피로 물들인다.
사랑이여 오호라.
나 한 개의 머릴 쓰리니,
그리하여 뭇사람 필요 없도다!
그는 백 개의 머리, 천 개의 머릴 쓰지만...... 


초왕의 목을 노리는 저 전복의 욕망. 들끓는 복수의 열망은 기묘한 평등을 낳는다. 거기엔 오직 한 개의 머리만 필요할 뿐이다. 한 개의 머리로 한 개의 머리를 취할 뿐. 그것이 구중궁궐 속의 왕의 목이라 하더라도 다르지 않다. 루쉰의 입장에서는 왕의 목을 베어 버리는 그런 혁명적인 과업에서도 단 한 개의 목만을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들은 민중이니, 무엇이니 하며 백 개, 천 개의 머리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나 루쉰에게는 그 많은 수가 번다할 뿐이다.  


실제로는 한 사람의 목으로 왕의 목을 취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실제와는 무관하게 루쉰이 그려내는 이 복수와 전복의 순간이 빚어내는 기묘한 평등은, ‘희생’이 끼어들 틈을 제거한다. ‘혁명은 피로 쓰여졌다’는 누군가의 말은 핏자국을 남긴 숱한 사람을 기억하게 만들지만 루쉰은 도리어 그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다. 거꾸로 복수란, 전복이란, 혁명과도 같은 그 순간은 오로지 내 피로만 입장권을 지불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사랑이란 특정한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누구를 사랑함이 아니다. 그 노래는 그 화자만을, 그 노래에 공명하는 이를 위한 매우 고독한 노래라 할 수 있다. 


이야기 끝에서는 미간척의 머리와 새까만 사내의 머리, 그리고 초왕의 머리가 끓어오르는 솥에서 서로 다툰다. 결국 이 셋의 머리는 뒤엉켜 솥에서 흔적조차 사라지고 초왕의 몸뚱이와 함께 장사된다. 혹자는 이를 공멸, 복수의 주체와 대상이 함께 사리지는, 그리하여 복수 조차 깨끗이 지워지는 것으로 풀이한다. 이어지는 결말 이후의 결말, 어쩔 도리 없이 백성들은 세 두개골을 받아들여야 했다. 슬픈 체 하는 후궁과 대신들의 모습은 복수에 무관한 이들의 무료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처절한 복수가 있었지만 상관없는 이들에게는 별 일이 아니었다는 말씀. 그저 무료한 일상 가운데 재미난 구경거리 가운데 하나에 불과할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복수란 복수를 꿈꾸는 자들에게만 빛나는 사건이다.


루쉰은 복수 이후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아마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루쉰이 그의 작품 내내 복수를 주제로 삼되 복수의 대상에 대해서는 크게 말하지 않기 때문일 테다. 그는 늘 전장에 있었으나, 그와 상대하는 이들은 늘 바뀌었으며, 종국에는 ‘무물의 진’이라 부를 만큼 구체적인 형체도 모습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그의 분투가 대상 없는 분투, 화병처럼 오로지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곤란하다. 도리어 복수의 대상, 분투의 상대보다는 복수를 수행하는 단독자, 끊이지 않는 분투 가운데 있는 전사에 더 많이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공멸’, 복수의 대상과 주체가 함께 소멸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도리어 복수에 천착한 루쉰에게 남는 것은 자멸自滅, 복수의 수행자가 몰락하는 그런 결말 밖에 없는 건 아닐까. 물론 여기에도 표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몰락이라 했으나, 이는 복수가 그 수행자를 삼키고 이른바 주화입멸하여 주체조차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그는 몰락을 기꺼워하며 그 몰락 속에 존재를 드러낸다. 


이 이야기가 기묘한 것은 그 미적지근한 미간척이 끓어오르는 솥 속에서 머리만 남아 마치 춤을 추며 노래하듯 생동감 있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저 새카만 사내도 이 복수의 순간에 광기를 번뜩이며 드러낸다. 끓어오르는 솥의 물, 뒤엉커 싸우는 세 개의 머리.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는 다툼. 주먹도 창도 칼도 없는 이 싸움터. 그러나 그 속에서 울리는 복수와 사랑의 노래. 자꾸자꾸 그 솥으로 고개를 들이밀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나도 그 속에 뒤엉커 놀아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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