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신편 #2
他們從此天天采薇菜。 先前是叔齊一個人去採,伯夷煮; 後來伯夷覺得身體健壯了一些,也出去采了。 做法也多起來:薇湯,薇羹,薇醬,清燉薇,原湯燜薇芽,生曬嫩薇葉……
그날부터 그들은 날마다 고사리를 뜯었다. 처음에는 숙제 혼자 뜯고 백이는 삶았다. 나중에는 백이도 건강이 좀 나아진 느낌이 들자 함께 뜯으러 나섰다. 조리법도 다양해졌다. 고사리탕, 고사리죽, 고사리장, 맑게 삶은 고사리, 고사리 싹탕, 풋고사리 말림...
<고사리를 캔 이야기>
‘백이 숙제 굶어 죽던 수양산’, 흥보가 한 대목을 차지할 정도로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는 매우 유명하다. <미쳐야 미친다>를 보면 조선 후기 김득신이라는 인물은 이 백이의 이야기를 사모한 나머지 <백이열전>을 십만 번이나 넘게 읽었단다. 비단 김득신과 같은 광인狂人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백이의 이야기는 조선의 선비들에게 수 없이 반복되어 읽혔다. 왕조의 몰락을 지켜보며 낡은 가치관을 고수한 채 죽음을 맞은 이 이야기는 조선 선비들에게 일종의 교과서와도 같았다. 지사志士. 무릇 선비는 뜻을 품어야 하며, 뜻을 품은 선비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기억될 것.
그러나 루쉰의 이야기는 그와 사뭇 다르다. 거기에는 어떤 고귀함도 보이지 않는다.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의 양로원에 있다가 무왕의 정벌 소식을 듣고는 길을 나선다. 주나라 곡식을 하나도 먹지 않겠다며 나섰지만 정작 별 대책이라 할 것은 없었다. 결국 주변에 있는 고사리를 뜯어먹는 수밖에.
흥미롭게도 루쉰은 백이와 숙제가 고사리를 뜯어먹었다는 식으로 끝나지 않는다. 루쉰은 묻는다. 굶어 죽도록 고사리를 뜯어먹었다면 대체 어떻게 먹었던 걸까? 그냥 생으로 뜯어먹었을까? 역사는 지나친 질문을 루쉰은 붙들어 잡는다. 이런저런 요리로 다양하게 변주해 먹지 않았을까? 따져보면 고사리로 해 먹을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가. 당장 고사리만 먹어야 한다면 우리네 삶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쳐먹고, 데쳐먹고, 삶아먹고... 구이, 샐러드, 장조림, 절임 등등.
따져보면 역사, 혹은 대의란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을 따져 묻지 않는다. 사람들의 삶은 하나의 의미를 전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뿐이다. 사실 백이가 어떤 사람인 게 무엇이 중요할까. 은나라의 몰락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허나 따져보면 사람의 성정이란 그렇게 단호하지 못한 것이어서 백이가 순순히 죽음을 맞았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도리어 원망에 욕까지 내뱉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이 더 적합하다.
문제는 디테일에 있다. 역사와 대의는 많은 것을 단순화하지만 실상은 자잘한 사건들로 끊임없이 변주되곤 한다. 굶주린 배를 쥐고 고사리를 먹었을 때 백이와 숙제는 어땠을까. 아마도 눈이 번쩍 뜨이지 않았을지. 양로원의 편안한 잠자리와 맛난 음식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름 신나게 고사리를 조리했을 테다. 흥 없이 어찌 다양한 조리법을 고안해 낼 수 있었을까.
그러나 문제는 고사리가 잡초처럼 무성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고사리는 점점 귀해졌고, 더불어 백이와 숙제의 삶도 고단해졌다. 그것뿐인가. 한 여인의 질문은 그들의 맛난 식사를 지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는다며 고사리를 먹는 건 어째서일까. ‘무릇 하늘 아래 임금의 땅 아닌 곳이 없다’ 했는데. 결국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체로 발견된다. 여기서 끝났다면 좀 다른 백이 이야기에 그쳤을 테다. 루쉰은 여기에 하나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백이와 숙제의 죽음을 둘러싸고 퍼진 다양한 소문을 소개한다.
그 가운데는 백이와 숙제의 손에서 고사리를 앗아간 아금이라는 여인의 말도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백이와 숙제가 굶어 죽을 지경에 처하자 하느님이 사슴을 보내 젖을 먹게 했다. 매일매일 풍성한 젖을 먹을 수 있게 되자 숙제가 딴마음을 품었단다. 젖도 맛있으니 사슴 고기도 맛있지 않을까? 하느님이 보낸 사슴은 숙제의 탐욕스런 마음을 알고는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결국 백이와 숙제는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
따져보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건 없다. 이 역시 아금이라는 여인의 말이다. 그는 탐욕스러운 욕심 때문에 굶어 죽었다 주장한다.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그 말을 수긍할 수 없다. 아금의 농담에 백이와 숙제가 화가나 고사리를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는 게 더 실상에 가까울 테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금의 이야기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실상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아금의 이야기가 그럴싸하기 때문이다. 탐욕스런 자가 벌을 받아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야 말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지 않는가.
기존의 이야기가 백이의 정의를 전했다면, 아금의 이야기는 또 다른 정의를 전한다. 앞의 이야기가 충의忠義를 이야기한다면 뒤의 이야기는 청렴清廉을 말한다. 허나 루쉰의 이야기는 아무런 정의를 전하지 않는다. 어떤 교훈이라 할만한 게 없다. 백이처럼 충정의 마음을 지킬 필요도, 아금이 주장하는 것처럼 겸허한 마음을 품을 필요도 없다. 그 누구도 승자가 아니다. 정의 따위는 영 거리가 멀다. 그저 사건만이 있을 뿐이다.
루쉰은 이렇게 이야기를 매듭짓는다. ‘설사 이따금씩 백이, 숙제 생각이 떠오를 때도 있었지만, 꿈길처럼 어렴풋이 떠오르는 광경은, 그들이 석벽에 웅크리고 앉아 흰 수염이 드리워진 큰 입을 벌리고 죽어라 사슴고기를 뜯어먹고 있는 것을 보는 듯한, 바로 그것이었다.’ 고고한 현인, 백이와 숙제는 사라지고 커다랗고 탐욕스런 입만 남는다. 뒤집어진 이야기.
하나 더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백이와 숙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사슴을 뜯어먹는 그 커다란 입을 닮은 건 아닐까? 쉽게 납득한다는 것은 뜯어먹기 좋도록 적당히 다듬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아금의 말에 안도의 한 숨을 내뉜 이들이야 말로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를 커다란 입으로 뜯어먹는 사람들은 아닐까.
루쉰은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를 새롭게 변주하지만 그렇다고 또 다른 메시지를 담지도 않는다. 그들이 충정으로 굶어 죽었다는 이야기마냥 탐욕 때문에 굶어 죽었다는 것도 어리석은 해석이다. 변주를 통해 루쉰이 목적한 것은, 옛이야기를 고쳐 쓰는 루쉰에게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가치라기보다는 헤아릴 수 없는 실상의 어떤 면모라 해야 할 테다.
누군가는 허위를 벗기면 진실이 드러난다 말하지만 루쉰이라면 허위를 벗기면 그저 허위만이 남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법하다. 따져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그렇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