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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07. 2018

억척스런 몸뚱이

고사신편 #4

巡士 — 這怎麼成。赤條條的,街上怎麼走。放手! 
(…) 
巡士 — 這真是……帶你去做什麼用呢?不要搗亂了。放手!要不然…… 
漢子 — 要不然,我不能探親,也不能做人了。 


순경 - 그게 말이 돼? 벌거벗은 채로 어떻게 길을 걷는단 말야? 손 놔!
(...)
순경 - 내 정말... 널 데려간다 해도 별수가 없다니까. 떼 쓰지마. 이것 놔! 안 그러면...
사내 - 안 그럼, 난 친척에게 갈 수가 없어. 사람 노릇도 할 수가 없어.   
<죽음에서 살아난 이야기>


무덤(賁), 루쉰은 그것이 자신의 종착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단 그것은 루쉰에게만 국한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 누구든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그러나 루쉰은 무덤, 곧 죽음을 단순히 닥쳐올 미래의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루쉰은 죽음을 향해 있지만 거꾸로 죽음으로부터 출발하기도 한다. 루쉰 전집이 <무덤>으로 시작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징이며 동시에 실제 루쉰의 사상적 면모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법. 이 둘은 서로가 포개어 있어 하나가 커지면 다른 하나도 커지기 마련이다. 삶을 골몰하는 자는 죽음을 골몰하며, 죽음을 노래하는 자는 삶을 노래하는 자이기도 한 것. 이 자명한 진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이 둘이 서로 함께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모른 채, 서로가 이면으로 존재함을 잊은 채 이 둘을 함께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삶이 곧 죽음이며, 죽음이 곧 삶이라는 식으로.  


물론 하나의 성찰로서 삶과 죽음을 동시에 보는 것은 적잖은 통찰을 제공해준다. 삶과 죽음을 포괄한 하나의 전체로서의 무엇. 그러나 이를 단순히 도식적으로만 이해한다면 결코 만날 수 없는 지평이 있다. 생동하는 삶도, 음습한 죽음도 어느새 증발해버리곤 한다. 무색무취. 삶도 죽음도 하나의 허무에만 담긴다. 마찬가지로 각각에 필요한 것을 무시하곤 한다. 죽음에는 고요함과 편안함이 필요하다. 삶에는 밥과 옷 등등이 필요하다. 


<죽음에서 살아난 이야기>에서 장주는 초왕을 만나러 길을 가던 중 해골을 하나 발견한다. 본디 <장자>에 따르면 해골이 죽음을 찬양하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야 하지만 루쉰의 이야기에서 장자는 기여코 이 해골을 살려내고 만다. 사명대천존을 불러 그저 무턱대고 살려내기만을 간청한다.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 아마 사명대천존은 그런 그를 놀려주려 해골을 살려주었을 테다. 그의 말을 보자. ‘너 역시 주둥이만 살아 있고 실천은 못 하는 놈이로고. 사람이지 신이 아니로고......’ 


살아난 사내는 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이로 보인다. 장자가 헤아려보니 약 500년 전에 죽은 이를 살려내었다. 그 사내는 잠깐 잠이 들었다 깼다고 생각하지만 이미 왕조도 바뀌어버린 500년의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곁에 두었던 짐도 사라지고, 그가 만나고자 했던 친척들도 남김없이 사라질 시간이다.  


벌거벗은 몸뚱이의 사내, 그는 다짜고짜 장자에게 자신의 짐과 옷을 내놓으라며 따진다. 장자 입장에서는 참 난감한 일이었을 테다. 죽음에서 살려주었는데 그깟 옷을 달라고 떼를 쓰다니. 장자는 다시 사명대천존을 불러 이를 죽음으로 돌려보내고자 하나 사명대천존은 나타나지 않는다. 한참을 드잡이 하다 결국 장자는 소매 속에 호루라기를 꺼내어 크게 분다.  


아뿔싸! 배경은 주나라 말기 춘추전국으로 보이는데 갑자기 순경 한 사람이 뛰어온다.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는 경찰봉까지 들었다. 그의 등장을 통해 이 이야기의 시대는 뭉개져버린다. 되살아나 발가벗은 몸뚱이의 사내와 장자 그리고 순경 이 셋이 감당해야 하는 건 이 벌거벗은 몸뚱이의 요구뿐이다. 옷과 짐을 내놓으라는 이 억척스런 호소를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사건을 벌였던 장자는 몸을 빼 달아나고 순경과 벌거벗은 사내만 남는다. 순경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순경도 별 방도가 없다. 아니, 사실 아무런 방도가 없는 건 벌거벗은 사내다. 그는 제가 가야 할 길도 잃었고, 사람 구실을 하며 살아갈 최소한의 무엇도 손에 쥔 것이 없다. 그에게 남은 건 떼쓰는 것뿐이다. 결코 잡은 손을 놓지 말 것.  


이야기는 순경이 호루라기를 불며 끝난다. 이 드잡이를 하는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누군가 달려오지 않았을까. 순경이 몇 더 달려들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순경보다 더 큰 어떤 존재가 등장할 수도 있다. 형명刑名을 상징하는 순경이 처음에 달려왔다면, 그다음에는 어쩌면 법관이, 군벌이, 황제가 등장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벌거벗은 사내는 어찌 될까?  


따져보면 그의 미래는 자명하다. 비록 이 순진한 순경은 경찰봉을 손에 들지 않았지만 경찰봉에 맞아 몸이 불구가 되고 계속 떼를 쓰다가는 죽음에 이를 수 있겠지. 허나 따져보면 그 사내에게는 그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제가 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것일 뿐. 아니면 끝까지 손에 쥔 것을 놓지 않을 일이다. 혹시 아는가 그 가운데 누가 바지 하나라도 던져줄지. 아니면 헝겊 조각이라도. 


되살아난 사내, 살아 있는 몸뚱이가 보여주는 것은 삶에는 더 많은 무엇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얻어내는 건 결코 쉽지 않다. 얻어낼 수 있을지조차 장담하기 힘들다. 그러니 남는 건 떼쓰는 일뿐이다. 떼쓰는 일. 살아 있는 몸뚱이에서 나오는 이 본연의 활동을 통해 루쉰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는 그를 통해 생명의 본모습을, 나아가 장자를 비웃었던 실천의 한 면모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겠다.  


장주를 상대로도, 순경을 상대로도 똑같은 것을 요구하는 이 사내는 2원을 요구하는 무뢰한을 닮았다. 그 끈질기고도 집요함은 이 이야기에서 벌거벗은 사대의 억척스러운 몸뚱이로 다시 등장한다. 따라서 끄트머리 순경의 호루라기 소리는 독자를 호출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 무례하고도 밑도 끝도 없는 요구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순경이 호루라기 소리를 듣고 이 현장으로 불려 왔듯이 우리도 불려진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해결하기 쉽지 않은 이 당혹스런 상황에서 우리는 죽음에서 튀어나온 몸뚱이를 마주하게 된다. 그는 살아 있음으로 요구한다. 마치 매일 몸뚱이가 세끼 밥을 내놓으라 다그치듯. 빚쟁이의 독촉보다, 그 어떤 숙제보다 꾸준하고도 집요하게 무엇인가를 털어 넣으라 요구한다.  


나는 루쉰이 죽음과 어둠을, 허무와 암흑을 주목하되 어찌 거기에 집어삼켜 먹히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병든 잎’으로 자처하나 어찌 병들어 쇠락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스스로 비문을 베껴 쓰고, 심장을 후벼 파 먹었다고 하면서도, 죽은 뒤에도 성가심을 이야기하는 그 말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그 역시 맨몸으로 태어난 사람이기에, 그 스스로 이를 끊임없이 자각했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겠다. 미친 듯이 불어 재끼는 호루라기 소리를 들으면서도 붙잡은 옷자락을 놓지 않았던 그 마음으로 글을 써냈던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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