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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루쉰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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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07. 2018

루쉰을 읽는다는 것


여기 분투하는 삶이 있다. 나에게 루쉰은 비뚤고 모난 정신, 번뜩이는 눈과 날카로운 이빨을 감추지 않는 과감함의 화신이다. 그의 글에는 양념이 없다. 담백하고 깔끔하다. 화려한 수사 대신 벌거벗은 몸뚱이가 거기에 있다. 그의 글은 늘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도도하고 고고한 형이상학의 말을 쓰지 않는다. 발에 차이는 말이며, 비쭉비쭉 솟아난 질문이 있다. 그는 어떤 작품을 쓰지 않았으며, 무슨 주의를 주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날렵하고 예민하다.


한 세기 전 글이 낡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세기 말에 태어나 20세기 초 격변의 시대를 살았지만 그는 시대와 호흡하는 동시에, 시대에 물들지 않았다. 근대와 계몽, 국가와 민족, 혁명과 이념... 그가 건드리지 않은 문제는 없으나 뻔한 답을 내놓지는 않았다. 문제를 문제로. 누구는 그에게 철학이 없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사유하는 정신이었다.


계몽은 민중과 지식인을 연결한다. 
그러나 루쉰의 경우 계몽은 일반적인 의미의 계몽이 아니다. 
계몽을 회의하는 계몽이다.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142쪽.


20세기 중국의 과제는 ‘국가’의 완성이었다. 이제는 한 걸음 나아가 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중국은 전통과의 단절을 통해 근대 국가의 탄생을 염원했다. 공자로 대표되는 저 낡은 정신과 대결하는 이로 루쉰이 숭상되었다. 그러나 이제 낡은 싸움이 끝나고 ‘중화中華’의 부활을 꿈꾸는 상황에서 루쉰은 예전처럼 빛나지 않는다. 한때 ‘민족혼’으로 불렸던 루쉰보다 문명의 수호자 성인 공자의 말이 숭상되고 있다. 루쉰이 필요 없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할지 모르겠다. 허나 이 지점이야 말로 루쉰을 루쉰 답게 읽을 수 있는 발판이다. 루쉰은 새로운 독해를 기다리는 살아 있는 텍스트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죽음을 자주 이야기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옛 글을 모아 묶은 책에 <무덤>이는 제목을 붙였다. 그렇다고 사람들에게 추모와 제의를 바란 건 아니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죽고 사라지듯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소멸을 기다리는 소박한 무덤을 하나 세운 것이다. 아쉬움의 흔적으로.


이 밖에 나 스스로에게도 하찮은 의미가 조금은 있다. 
그것은 바로 아무래도 생활의 일부 흔적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비록 과거는 지나가버렸고 
정신은 되밟을 수 없는 것임을 잘 알고 있지만, 
모질게 끊어 버리지 못하고 찌꺼기들을 주워 모아 
자그마한 새 무덤을 하나 만들어 
한편으로 묻어두고 한편으로 아쉬워하려 한다. 
머지않아 사람들이 밟아 평지가 되더라도 
그야 상관하고 싶지 않으며 상관할 수도 없다. 
<무덤: 제기>, 루쉰전집 29쪽. 


남의 무덤을 들여다본다는 건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무덤에서는 부패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도리어 전진하는 말이 있다. <무덤>에는 청년 루쉰의 질문이 담겨 있다. 이 <무덤>을 시작으로 루쉰의 글을 가능한 꾸준히 읽어보려 한다. 그는 생전 수많은 글을 남겼다. 그 방대한 글을 어디까지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해보자. 다행히 루쉰 전집 대부분이 번역되었다. 



그는 백화白話, 현대 중국어가 정착되기 이전을 살았다. 그의 문장에는 고문古文이 묻어난다. 그는 고문을 버리고 백화문을 주창했지만 누구보다 고문에 밝은 인물이었다. 가능하면 일부를 원문으로 읽어보며 루쉰 문장 특유의 맛을 느껴보고자 한다. 번역으로는 읽히지 않는 문체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루쉰과의 만남은 꽤 반가운 경험이었다. 시대의 풍랑에 젖지 않고 우두커니 걸어간 삶이 좋았다. 거칠고도 날카로운 문장이 좋았고, 회의하고 침잠하는 사유가 좋았다. 루쉰의 글은 여전히 두근거림을 선물해주고 있다. 그러니 루쉰을 읽으며 언젠가 그의 자취가 남아 있는 땅을 찾아볼 계획이다. 옛사람이 거기에 있겠냐만, 그래도 달리 읽을 기회가 되지 않을까?


루쉰 세미나 @우리실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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