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픈옹달의 논어읽기8
선생 “달려들지 않으면 깨우쳐 주지 않았고, 애태우지 않으면 튕겨 주지 않았고, 한 귀를 보여 줄 때 셋까지 깨닫지 못하면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다.”
공자가 말했다. “저는 학생이 애가 탈 정도로 알고 싶어하지 않으면 깨우쳐주지 않고, 표현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가 아니면 말문을 틔워주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사각형 한 귀퉁이를 제가 보여줬을 때, 학생이 그걸 보고 곧장 ‘어? 나머지 세 귀퉁이가 있겠군요!’라고 대답하지 않고 ‘응? 뭐지? 뭘까요?’라는 반응을 보이면 더는 알려주지 않죠.
鄭曰 孔子與人言 必待其人心憤憤 口悱悱 乃後啟發為說之 如此則識思之深也 說則舉一隅以語之 其人不思其類 則不復重教之
鄭曰: 孔子께서 남과 이야기하실 때에 반드시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알려고 노력하고 입으로 표현하려고 애쓰기를 기다린 뒤에 깨우치고 틔워주기 위해 말씀을 해주셨으니, 이와 같이 하면 識見과 생각이 깊어진다. 말해 주실 때는 한 모퉁이를 들어 일러주시고, 그 사람이 나머지 세 모퉁이를 類推하여 생각지 못하면 다시 일러주지 않으셨다.
번민하거나 끙끙거림을 기다리지 않고 열어 주면, 아는 것이 견고할 수 없다. 번민하고 끙끙거림을 기다린 다음에 열어 주어야 힘차게 나아간다. - 명도
[어류]
끙끙거림(悱)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니고, 3~5할은 이해하지만 다만 표현하지 못할 뿐이다.(71) 학생은 번민하고 끙끙거린다면(憤悱), 그 마음이 이미 대략은 뚫린 상태이다. 다만 마음으로는 깨달았지만 확실한 믿음이 없고, 입은 말하려고 하나 표현하지 못하는 상태이므로, 성인이 거기서 계발시켜준다.(69) 번민하고 끙끙거려야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번민하거나 끙끙거리지도 않았는데 계발시켜주면, 결국 세 귀퉁이를 유추하는 대답을 못하게 되고, 따라서 그는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또한 가르침을 듣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이을호의 풀이가 재미있다. 분憤을 ‘달려들다’로 풀었는데 이는 다산의 풀이를 참고한 것이 아닌가 싶다. 다산은 ‘心之怒: 성냄’이라고 풀이했다. 주희는 ‘心求通而未得之意: 깨닫고자 하여도 얻지 못함’이라고 풀이했다. 문득 궁금해서 더 찾아보았더니 <강희자전>에는 ‘鬱積而怒滿: 울적하여 가득 성남’이라 풀이했다. 다산의 풀이가 더 적극적이나 실제 경험으로 옮기면 답답해하는 경우는 있어도, 저렇게 달려든다고 할 정도의 사람을 만나기는 매우 힘들다.
임자헌의 풀이는 좀 과하다. ‘삼우반三隅反’에 대한 풀이가 너무 번잡하다.
하안과 주희는 모두 기다림(待)과 따져봄(類)에 대해 이야기한다. 선생은 기다릴 줄 알아야 하고, 학생은 스스로 따져볼 줄 알아야 한다. 이 둘이 마주칠 때야 비로소 배움이 일어난다.
확실히 공자는 오늘날 사람들이 기대하는 ‘친절한 선생’과는 거리가 멀다. <논어>를 보면 그의 기준은 확고하다. 그는 결코 제자들을 쉽게 칭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어떤 긴장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