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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05. 2018

글쓰기의 무간지옥

옹달쪽지

글은 써야 늡니다. 이 간단하고도 명쾌한 현실에 글쓰기의 비극이 있습니다. 거꾸로 쓰지 않으면 도통 실력이 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여느 능력과 마찬가지로 글쓰기도 타고난 능력이 빛을 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걸음마를 뗀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발 자전거를 타고, 높은 암벽에 오르기도 하는 아이가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타고난 재능으로 글쓰기가 빛을 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언어의 재능처럼 글쓰기의 재능도 타고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글쓰기를 하지 않으면 실력이 늘 수 없습니다. 더구나 글쓰기는, 언어란, 사유란 평생에 걸쳐 필요한 활동입니다. 글쓰기로 밥 벌어먹고, 글쓰기로 직업을 갖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짧거나 긴 글을 써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말하지 않고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글쓰기는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행위이며, 동시에 어떤 문제를 골똘히 생각해보는 활동입니다. 


우리 시대의 안타까운 현실 가운데 하나는 태반의 사람이 10대 후반의 글쓰기 실력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학교에서야 이런저런 과제 때문에 글쓰기를 합니다. 허나 학교를 졸업하고는 글쓰기를 할 기회가 좀처럼 없습니다. 대학에 가더라도, 글과 문장이 가까운 전공이 아니면 깊이 있는 독서도, 치밀한 글쓰기도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10대 후반의 정체된 글쓰기 능력으로 평생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아니, 오히려 시간의 풍화작용에 깎여 글쓰기 능력이 퇴화되는 경우가 더 많겠지요. 글쓰기를 하지 않아 글쓰기 실력이 늘지 않고, 글쓰기 능력은 늘 뒷걸음칩니다.


글은 쓰면 늡니다. 이 놀랍고도 명쾌한 현실 때문에 많은 글쓰기 강좌는 문전성시입니다. 일단 쓰면 실력이 늘기 때문에 글쓰기 강좌는 좀처럼 실패하는 일이 없습니다. 물론 특정한 지점에 이르면 각각의 글쓰기마다 돌파해야 하는 장벽이 있습니다. 허나 글쓰기를 하지 않아 실력이 제자리걸음, 혹은 뒷걸음질 친 사람이 태반이라 대부분 일단 쓰면 늡니다. 따라서 글쓰기의 비결이란 ‘쓰기’라는 역설적인 진리를 마주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쓰기’가 어렵습니다. 글쓰기라는 능력, 기예, 실력은 둘째 치더라도 ‘쓰기’ 자체가 어렵습니다. ‘쓰기’가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글쓰기를 못한다’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글쓰기를 못하기 때문에 ‘쓰기’를 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글쓰기를 못한다는 생각은 글쓰기 능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나옵니다. 헌데 글쓰기 능력이 부족한 것은 쓰지 않기 때문이지요. 글쓰기 능력이 부족해서, 글쓰기를 못하고, 글쓰기를 못하니 쓰지 못하고, 쓰지 못하니 글쓰기 능력이 늘지 않고, 글쓰기 능력이 크지 못하니, 글쓰기를 못하고, 그러니 쓰지 못하고...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다 보면 도무지 빠져나올 구석이 없습니다. 마치 동그란 원이 되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습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이 저주스러운 굴레를 글쓰기의 무간지옥이라 불러야겠습니다. 무간지옥이란, 끝이 없는 지옥이라는 뜻입니다. 끝이 없으니 어디까지 빠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바닥에 닿아야 빠져나올 길을 찾을 텐데 바닥에 닿지도 않으니 출구를 찾아 도약할 수도 없지요. 이 돌고도는 굴레야 말로 글쓰기를 방해하는, 글쓰기를 실패하게 만드는, 아니 글쓰기 자체를 막는 커다란 장애물입니다.


이 끝없는 지옥은 어찌나 힘이 센지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고리 가운데 하나를 끊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이 무간지옥에서 ‘쓰기’로 빠져나오기란 어찌나 힘든지요. 그것은 ‘써야지’라는 놈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 글쓰기 지옥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이놈, ‘써야지’라는 놈이 발목을 붙잡고 끝끝내 놓아주지 않습니다. 글은 써야 는다는 사실을 알고, 쓰면 는다는 확신이 있으면서도, 써야겠다는 다짐을 하더라도 ‘써야지’는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놈, ‘써야지’라는 놈은 제 스스로를 낳습니다. ‘써야지’는 ‘써야지’를 낳고, ‘써야지’는 ‘써야지’를 낳고... 그래서 마치 환영처럼 끊임없이 ‘써야지’만 주문처럼 되뇌는 지경에 이릅니다. '써야지, 써야지, 써야지, 써야지...’


따라서 어떻게 보면 글쓰기 무간지옥의 다른 이름은 ‘써야지’라고 해야 합니다. 이 질기고 억센 놈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요? 이 끝없는 글쓰기 지옥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 무간지옥에서 나오는 것이, 그 구원의 이름이 ‘쓰기’라는 것은 알겠는데 ‘쓰기’는 너무 멀고 아득합니다. 


다행히도 세상에는 얼마간의 희망이 있어 이 비극적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천사처럼 우리를 도와주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 천사의 이름은 ‘마감’입니다. ‘마감’은 ‘써야지’를 상대할 가장 강력한 존재입니다. ‘마감’의 힘은 ‘써야지’를 물리치는 단호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감’이란 결코 물러섬이 없습니다. ‘써야지’의 주저함은 ‘마감’이라는 견고한 결단에 의해 힘을 잃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이 천사, ‘마감’의 손을 잡고 ‘쓰기’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마감’의 강력한 능력에도 꿈쩍하지 않는 ‘써야지’도 있습니다. 이 둘의 처절한 싸움의 결과, 늘 ‘마감’이 승리자가 되는 건 아닙니다. 그때에는 다른 천사의 이름을 찾아야 할 텐데 이 부분은 더 궁리를 해보야겠습니다. 


어떤 작가는 자기 창작의 어머니로 ‘마감’을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한편 ‘마감’의 힘을 신봉하는 사람은 그를 신으로 추켜 세우며 ‘마감의 신’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거창하게 말하면 이렇게 되겠네요. ‘마감의 신’이 임하시는 날 글은 태어난다고. 


그렇게까지 거창할 필요는 없겠지만, 언제건 ‘마감’이 손을 내밀어 ‘쓰기’로 인도할 때 그 손을 팽개치지 않기 바랍니다. 제 스스로 튼튼한 다리와 성실한 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감’을 만날 일도 없겠지만, ‘마감’을 만났다면 그 튼튼한 손을 꼬옥 붙잡고 한 걸음을 떼길 바랍니다. ‘쓰기’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글은 써야 늘지만 쓰면 늡니다.  마감이야 말로 글쓰기의 가장 강력한 조력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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