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는 옹달 #12 - 태산편 병丙
여행은 이동과 이동의 연속이다. 따라서 한정된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로를 잘 짜는 것도 필요하지만 몸을 가볍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태산에 오르기 전 우리는 타이안 역에 들려 짐을 맡겨두었다. 최소한의 짐만 들고 산에 올랐다. 산에서 내려와 칭다오로 이동하기 전 짐을 다시 찾았다. 호텔, 역, 상점 등에서 짐을 맡아주곤 한다. 잘 이용해야 쾌적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날씨는 말 그대로 복불복이다. 날씨가 좋지 않으면 여행 전체가 엉망이 될 수도 있다. 날씨에 따라 여행의 질이 크게 차이 나기 마련. 4월과 9월 두 차례 모두 날씨가 좋아 다행이었다. 9월 여행의 경우 둘째 날 아침 비를 맞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감안할 정도였다. 만약 태풍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행여 태산 꼭대기에 숙소를 마련했는데 비가 오거나 한다면? 일출을 볼 수 없다면? 그러니 좋은 날씨를 만나도록 덕을 쌓고 기도를 하자.
2018년 1월 1일.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새벽에 일어나 남산에 올랐다. 일출을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남산이 코앞이라 별생각 없이 산에 올랐다. 그런데 정상 부근에 도착하니 아뿔싸, 그렇게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발 붙일 곳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 많은 사람과 함께 추위에 떨며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태양을 보겠다고 한참을 기다렸다. 일출을 보고 산을 내려오며 문득 궁금했다. 내일도 사람이 많이 찾아올까?
태산은 늘 사람으로 북적인다. 우리처럼 여행차 오는 사람도 있지만 기도하러 오는 사람도 꽤 많다. 향을 한 뭉치 사서 산에 오르는 사람을 쉬이 볼 수 있다. 사당마다 쉴 새 없이 피워대는 향으로 연기가 자욱하다. 흔히 중국에는 종교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주의 국가에 무슨 종교냐며. 허나 이런 자리에 오면 과연 종교가, 신앙의 행위가 영영 사라질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취푸에서도 경험한 것이지만 중국의 밤은 여전히 어둡다. 10년도 훌쩍 넘은 한참 전, 구이저우성의 어느 산골 마을에서 밤을 지낸 적이 있었다. 저녁 8시면 전기가 내려가는 산골 마을에서 본 밤하늘은 맑고 아름다웠다. 깐수성의 초원에서 경험한 밤하늘도 나름 장관이었다. 한 없이 펼쳐진 하늘. 태산의 밤은 하늘보다는 땅을 향하게 한다.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는 타이안泰安시의 야경이 인상 깊다.
산을 오르느라 피곤하니 일찍 쉬어야 한다. 게다가 일출을 보려면 컴컴한 새벽에 눈을 떠야 한다. 우리가 묵는 호텔에서는 새벽에 방문을 두드리며 깨워준다. 게다가 길잡이까지 붙여준다. 새벽 공기를 마시며 모인 인원이 꽤 된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 30분 정도 걸은 듯싶다. 오르락내리락 컴컴한 어둠을 뚫고 한참을 걸으니 사방이 트인 봉우리에 닿았다.
지난 4월 일출을 보았던 곳보다 한참이나 먼 곳이다. 그곳에서 맞은 일출도 꽤 훌륭했지만 역시 산봉우리에서 맞는 일출의 장쾌함에는 비할바 못 된다. 다행히 날씨도 맑아 동쪽 끝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똑똑히 지켜볼 수 있었다. 해가 뜨니 어둠에 감춰져 있던 세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동튼 이후에야 발을 딛고 선 봉우리의 참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뚝 솟은 모양이 꽤 아찔해 보인다.
신기하게도 햇살이 비치며 확 트인 세상이 눈에 들어오자 가슴도 함께 열리는 기분이다. 까마득하게 먼 산과 들이 한눈에 들어오니 어째 한 손으로 이것을 다 가질 수 있을 듯싶다. 그래서일까? 태산의 세워진 여러 비석 가운데 '공자소천하처孔子小天下處'라고 쓰인 것이 유명하다. 공자가 천하를 내려보며 작다고 여긴 곳이란다. 물론 이는 과장이다. 천하를 어찌 산에서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을까. 하늘과 맞닿은 이곳이 선사하는 시원함을 달리 말한 것이리라.
컴컴한 새벽에 깨어 붉게 타는 태양을 맞으니 기분이 좋다. 끝없이 햇볕에 몸을 맡기고 이 넓은 세상을 만끽하고 싶을 뿐이다. 모두 지난 시간의 피곤은 잊고 멋진 풍경이 선물하는 광경에 넋을 잃었다. 말없이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 필연처럼 닥칠 아쉬움을 미루기 위해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돌아와 훑어보니 찍어두길 잘했다는 생각이다.
어느새 태양이 높이 떴다. 아침 분위기를 맞으며 왔던 길을 돌아간다. 이런 험준한 길을 성큼성큼 걸어왔다니. 어둠이 선물한 용기가 자못 대단하기도 하다. 숙소에 도착해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아침을 먹고 하산 전에 다시 조금 더 올라야 한다. 바로 옥황전에 이르기 위해.
천가를 지나 다시 높은 계단을 오르면 몇 개의 사당이 있다.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당은 '옥황전玉皇殿'. 맞다, '옥황상제玉皇上帝'를 모신 곳이다. 그래서 이 태산의 봉우리를 옥황봉이라 이름 붙였다. 옥황전은 생각보다 소박하다. 천황天皇, 옥황상제의 집이 이렇게 간소하다니. 그러나 글자 하나 없는 거대한 비석, 무자비無字碑는 이 태산의 위엄을 잘 보여준다. 사람 키의 갑절이나 되는 이 거대한 비석을 누가 언제 짊어지고 온 것일까? 한 무제 시절 세웠다고 하는데 과연 정말 그럴지. 그렇다면 이 비석은 이천 년 넘게 이 산을 지키고 있는 셈이다. 글자 하나 없는 것은 차마 담을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옥황전을 둘러보며 인상 깊은 작은 비석을 발견했다. '유천재상惟天在上: 오직 하늘만이 위에 있다.' 거꾸로 말하면 이 아래가 바로 천하天下라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이라는 뜻. 해발고도로 따지면 이보다 높은 곳이 수두룩할 테다. 그렇지만 그렇게 높은 곳에 오른다고 모두 상제를 만날 수는 없는 일이다. 상징과 전설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옥황전 아래에 '공묘孔廟', 공자의 사당이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인간 가운데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른 인물이 공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천신天神의 세계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바로 공자이다. 고대인들의 사유 속에 태산은 이처럼 다양한 상징을 품은 산이다. 오악독존五嶽獨尊, 중국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산 가운데 으뜸이라는 말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다시 산에 오르니 어제 빌린 군용 파카가 무겁다. 그래도 찬 바람을 막아주기도 하고, 깔고 앉아 풍경을 돌아볼 수도 있으니 나름 쓸모가 다양하다. 넓고 푸른 하늘을 한 없이 즐기고 싶지만 이제는 슬슬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태산 정상의 호텔은 체크아웃 시간도 빠르다. 서둘러 정리하고 내려가야지.
우선 남천문에서 중천문까지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기로 했다. 세찬 바람에 휘청거리는 바람에 케이블카의 짧은 시간은 좋지 못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래도 중천문에서 내려가는 길은 꽤 가뿐하고 즐거웠다. 내려가는 길에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어찌나 많던지. 저들도 끝없이 이어진 돌계단이 지겨운 모양이다.
천신天神의 세계에서 세속의 세계로 단숨에 내려왔다. 세상은 여전히 별일 없이 시끄럽다. 먼 길을 내려왔으니 우선 배를 채워야지. 그리고 다시 칭다오로 돌아가 여행을 정리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