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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an 10. 2019

복수자

루쉰, 전사의 글쓰기 #9

미간척이 새 옷을 꺼내 입어 보니 크기가 몸에 딱 맞았다. 그는 옷을 벗어 다시 잘 개어 놓았다. 검도 헝겊에 잘 싸 베개맡에 놓고는 조용히 누웠다. 그는 자신의 유약한 성격이 벌써 고쳐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결심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잠을 푹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리라. 그리고 여느 때와 조금도 다름 없이 조용히 그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아가리라.

그러나 그는 줄곧 깨어 있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였다. 자꾸 일어나 앉고 싶었다. 그는 실망에 찬 어머니의 가벼운 한숨소리를 들었다. 첫닭이 우는 소리를 들은 그는 이미 자정이 지났으니 자신이 열여섯 살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검을 벼린 이야기>


인상 깊은 영화 두 편. 하나는 <품행제로>. 한 불량학생의 삶을 그린 이 영화는 매우 실감 나는 작품이었다. 배우 류승범의 찰진 연기는 학창 시절 교실에 있던 몇몇 친구들을 기억나게 만들었다. 건들거리는 행동이며 말투까지. 그런 묘사보다 이 영화가 기억남은 이유는 그가 벌이는 싸움 때문이었다. 그저 물건을 집어던지며 아웅다웅 벌이는 다툼을 보여준다. 거기엔 멋도, 건들거림도, 이른바 가오니 후까시니 하는 것도 없다. 그저 끙끙거리며 지저분하게 싸울 뿐이다. 한편으로는 찝찝했으나, 화려한 돌려차기나 주먹 한방의 짜릿함 따위가 없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시원했다. 본디 싸움이란 저런 것이니.


다른 하나는 <똥개>. 역시 좀 불량스러운 청년의 삶을 그린 영화다. 좀 멍하니 나사가 빠진 것 같은 청년. 90년대 말, 말 그대로 간지 나는 역할로 20년 넘게 기억되는 정우성이 주인공이었다. 그가 주인공 똥개 역할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그가 수돗가에 주저앉아 엉덩이를 긁는 모습이란. 이 영화가 기억에 남는 것 역시 그의 연기 변신 때문이 아니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싸움 역시 멋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정말 제목대로 개싸움을 보여준다. 그저 물고 물리는 싸움. 


문득 싸움에 대한 환상은 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싸움이 폼나는 일이라는 환상은 무엇이 심어준 것일까? 누군가 신화는 현재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신들의 전쟁이란, 신화처럼 멋진 싸움이란 그저 현실의 찌질한 싸움을 가리기 위한 방편으로 고안된 것일 수 있다. 따라서 나름의 답을 찾자면, 싸움다운 싸움이란 본디 존재하지 않으며, 주먹다짐과 같은 영 아름답지도 숭고하지도 않은 찌질한 다툼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이 '일상의 다툼'을 가리고 감추기 위해 '멋진 싸움'이라는 것을 고안해 낸 것일 테다.


나이가 들면서 하하호호하는 삶이 얼마나 요원한 것인지를 실감한다. 이른바 우아한 삶 따위는 없다. 질퍽이는 진창에 살고 있는데 어찌 발에 진흙을 묻히지 않을 수 있을까? 아! 물론 가능하기는 하다. 아무리 질퍽이는 진창이라 한들, 먼지 하나도 몸에 남기지 않는 법도 있다. 남을 깔고 앉으면 된다. 남을 진흙 속에 쑤셔놓고 그를 밟고 살면 될 일이다. 그럼 마치 꽃길을 밟는 것마냥 살 수 있다. 그렇게 못 사는 것은? 몰라서가 아니라 그럴 수 없어서다. 이미 진창에 온 몸이 빠져 옴짝달싹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수한 영혼이, 매끈한 삶이 싫어진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진창 속에 허덕이는 삶이라면 순수한 영혼과 매끈한 삶이란,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삶이라기보다는 세속을 모르는 삶이다. 얼마간 그들을 따라 하하호호 웃으며 맞장구를 쳐줄 수는 있겠지만 그것뿐이다. 언젠가 웃음이 다하는 날도 올 것이고, 그 웃음이 품은 가식을 뒤늦게 깨우칠 날도 올 것이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삶이란 그렇다.


글에는 삶이 묻어 나오기 마련이다. 글쓴이와 무관한 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 그런 글이 가능한지 의문이다. 발에 채이는 삶은 발에 채이는 글을 낳기 마련이며, 상처 입은 삶은 그만큼의 독성을 품기 마련이다. 물론 그렇게 따지면 하하호호 다 같이 웃을 수 있는 글도 있겠지만 나와는 무관할 뿐이다. 누군가 나에게 글이 모나고 날카로운 이유는 삶이 못나서 그렇다고 말했다. 제 열등감에 남에게 시비를 걸고, 남을 걸고 넘어며, 남과 싸우는 글만 써낸다고 말이다. 따져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내가 하하호호 웃는 삶이라면 그런 글 따위는 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글쓰기를 할 생각도 하지 않았겠지. 글쓰기는 분투의 도구이다. 따라서 그 말은 반만 맞다. 일부러 까다롭고, 까칠하며, 날카롭고, 예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글쓰기를 분투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았다면, 그저 내 열등감이나 질척이는 삶을 고스란히 남겼다면 그렇게까지 손가락질받았을까 의문이기도 하다. 글에는 얼마간의 과장과 거짓이 섞여 들어가기 마련이다.


<검을 벼린 이야기>의 주인공 미간척은 복수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기에는 영 부족해 보인다. 허나 그 때문에 복수를 이야기하는데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도 하다. 복수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그렇게 매끈한 이야기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져보면 복수와 싸움은 좀 다르다. 싸움이 동등한 개인들 간의 다툼이라면 복수란 어느새 위계가 정해져 있다. 복수하는 자와 복수를 당하는 자. 하나는 낮고 하나는 높기 마련이다. 따라서 복수란 앙갚음과는 좀 다르다. 복수는 출발부터 해결될 수 없는, 해결되기 까다로운 조건에서 출발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복수를 낳은 것이 무엇이건 간에 복수에 이르기 전에 이미 해결되어 버렸을 것이다.


복수에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하겠다는 전복의 욕망이 담겨 있다. 따라서 복수자는 출발부터 결코 고고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잘난 존재였다면 어찌 복수가 필요했을 것인가. 복수자 미간척이 잠을 뒤척이는 것도 당연하며, 잠을 뒤척이던 그가 복수자가 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다고만 한들 영영 복수는 불가능할 것이다. 거기에는 잠깐의 도약이 필요하다. 검과 옷을 챙기고 '자신의 유약한 성격이 벌써 고쳐진 것 같은 생각'이 든 순간의 결심이. 동도 트기 전 검을 짊어지고 성문으로 들어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철저한 자기 변신이라고까지는 이야기하지 말자. 존재의 변신은 그렇게 쉬이 찾아오는 게 아니다. 변신보다는 소멸이 더 빠른 법.


<검을 벼린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가운데 하나는, 복수에 실패한 미간척이 자신의 목을 치는 장면이다. 새끼 쥐 하나 죽이지 못한 우유부단함이, 몰려드는 사람을 다치게 할까 저어했던 마음이, 멱살을 잡아 시비를 거는 이를 팽개치지 못한 나약함이 거기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검과 머리를 요청하는 검은 사내에게 순수히 검을 내어준다. 자신의 머리와 함께.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복수자에게 자기 소멸이야 말로 가장 가까운 일이기 때문이다. 복수를 완성하는 것보다 자신을 없애는 것이 더 쉽다. 복수의 대상은 가 없이 멀고, 자신은 너무나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복수자의 소멸이 복수의 실패로 이어지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루쉰은 복수자의 소멸로 복수가 가능함을 이야기한다. 


미간척의 복수는 검은 사내를 통해 가능해진다. 검은 사내는 의협심이니 동정심이니 하는 것 따위를 모르는 인물이다. 그는 숱한 상처를 가졌으며, 자신을 증오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미간척이 검은 사내에게 자신의 검과 목을 건네주는 이야기는 어쩌면 무엇인가를 버려야 한다는 우화처럼 읽히기도 한다. 우유부단함과 나약함을, 의협심이나 동정심을. 그러나 거꾸로 복수자가 그 스스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과 내가 만든 숱한 상처' 속으로, 자신에 대한 처절한 증오로.


이제 '아버지의 원수'는 그저 '원수'가 되어 버린다. 무엇을 위한 복수는 사라지고 복수만이 남을 뿐이다. 목적도 방향도 없는 복수라고 하여, 목적도 방향도 잃은 복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목적과 방향을 넘어서는 복수이다. 미간척이 생각했던 복수란 고작 임금의 목을 취하는 것이었다면 검은 사내의 복수란 임금의 코와 입을, 얼굴을 물어뜯는 것이며 나아가 그와 뒤섞여 함께 장사 지내어지는 것이다. 이는 거꾸로 그를 나의 삶으로, 질척이는 이 삶의 현장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며, 또한 복수를 통해 내가 그의 자리를 꿰차는 전복의 순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싸움의 목적이 승리에 있다고 말한다. 허나 불만이 싸움을 낳는 것이라면, 싸움의 목적은 승리에 있지 않을 것이다. 이 뒤틀리고 비틀린 세계의 싸움이란 한 존재가 그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 가운데 하나일 수밖에 없다. 복수 역시 마찬가지. 따라서 고상한 싸움이 없는 것처럼, 말끔한 복수란 것도 없을 것이다. 복수의 완성이라는 것도 없을 것이다. 


다만 참된 복수자와 참된 복수라 할만한 것이 있을 테다. 숱한 상처, 다른 사람과 내가 만든 숱한 상처만이. 그리고 증오만이 제 존재를 향한, 제 삶에 찰싹 붙어 있는 현재를 향한 증오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게 복수자는 바로 지금, 제 손에 칼을 들고 검을 휘두른다. 그 검은 상대의 목을 치는 검이며, 동시에 자신의 목덜미를 노리는 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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