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서당 이야기 #3

by 기픈옹달



오늘 우리는 문장의 홍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디나 읽을 것 투성이입니다. 누군가는 책 대신 스마트폰에 빠져 사는 시대에 무슨 이야기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마트폰이야말로 문자의 보고 아닌가요? 얼마나 많은 글을 스마트폰으로 소비하고 있는지요. 카카오톡 메시지, 페이스북과 같은 SNS, 게다가 포털 뉴스 기사를 비롯해 다양한 의견의 댓글까지. 하루에 읽어내는 글의 양을 다 모으면 책 한 권 분량은 족히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것을 과연 ‘읽기’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읽기는 글을 훑어내는 것과는 다릅니다. 빽빽한 텍스트의 더미 속에서 필요한 정보를 뽑아내는 데는 익숙하지만 고유한 호흡과 리듬을 가진 글의 매력을 맛보는 데는 점점 무뎌지고 있습니다. 글은 많이 접하는데 읽기와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상황인 것이지요. 그래서 엄청난 양의 문자를 소비하지만 남는 건 별로 없습니다.


글은 본디 저마다 고유의 맛과 멋을 가지고 있습니다. 글을 읽으면 글쓴이의 손길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문장을 적어 내려간 그의 표정이 보이기도 하고,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감정의 흔적이 짚이기도 합니다. 미쳐 문장으로 담아내지 못한 미세한 떨림이 전해지기도 하며, 낯선 공기가 우리를 휘감아 새로운 시공간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경험의 순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습니다. 고귀한 만남은 늘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렇다고 화폐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화폐로 바꿀 수 없는 수고로움이 필요합니다. 직접 소리 내어 읽고 쓸 때 우리는 문장이 가진 다른 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읽기’와 ‘쓰기’라는 오래된 방법이야 말로 글의 세계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입니다.


서당에서는 읽기를, 그것도 소리 내어 읽기를 강조합니다. 귀에 못 박히도록 듣는 이야기가, '허리를 펴라', '목소리를 내라', '함께 소리를 맞추어 읽어라'라는 잔소리입니다. 내 몸은 울림통이 되고, 글은 소리가 됩니다. 그렇게 울리는 소리 속에 글을 만나는 것. 이것이 서당 공부의 목표입니다. 처음에는 귀찮기도 하고, 낯설기도 합니다. 평소에 소리 내어 글을 읽는 경우가 없거든요. 게다가 한 목소리로 읽는 것은 더더욱.


소리 내어 읽는 것도 귀찮은데 자꾸 반복해서 읽으라니 답답할 지경입니다. 정확히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논어>는 족히 수십 번은 읽습니다. 길이에 따라 다르지만 시도 그에 못지않게 읽습니다. 자연스럽게 암송이 될 정도로. 정말 '달달' 읽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식하게 보이는 방법을 고집하는 이유는 바로 읽기야말로 글과 만나는 가장 원초적인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묵독默讀이 일반이지만 옛 글은 모두 낭독朗讀을 위해 쓰였습니다. 입말과 글말이 따로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 서당에서는 책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하지요. 글을 직접 소리 내어 읽어보면 느낌이 매우 다릅니다. 같은 글도 눈으로 볼 때와 소리 내어 읽을 때 다른 감각을 선물합니다. 특히 고유한 세계를 지닌 시는 더욱 그렇지요.


시詩야 말로 소리 내어 읽기 위해 쓴 글입니다. 옛날에는 시와 노래가 따로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시가詩歌라고 부르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우리네 학교 교실에서는 시의 노래적 특성을 도무지 맛볼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고작해야 몇 음보니 운율이 무엇이니 하는 것을 딱딱하게 욀 뿐이지요. 단어마다 밑줄 치며 상징을 분석하기 바쁩니다. 문제 풀이를 대비한 시 읽기, 아니 시 공부.


그래서일까요? 교과서에 실린 시 치고 훌륭하지 않은 시가 없지만 정작 매력적으로 느낀 시는 거의 없습니다. 생동감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방법으로 시를 익혔기 때문이지요. 그런 까달게 보통 사람들이 시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난해하고 복잡한 글. 도통 알 수 없는 말을 대충 묶어놓은 불친절한 글. 시험에서 만나기 싫은 글.


한 번은 악명 높은 시 이상의 <오감도>를 토요서당 친구들과 읽었습니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로 시작되는 이 시를 소리 내어 읽습니다. 띄어쓰기도 없어 읽는데 기묘한 느낌을 줍니다. 게다가 계속 반복되는 표현, ‘무섭다고그리오.’ 큰 소리로 여러 번 읽다 보면 기묘한 분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함께 읽은 친구들의 표현을 빌리면 뭔가 괴상하고 무서운 느낌.


그런데 보통 초등학생 친구들은 매우 재미있게 읽습니다. 반복되는 표현에 읽다 보면 신나거든요. 똑같은 표현을 반복하며 읽는 가운데 그 웅성거림 속으로 함께 빠져듭니다. 어느 순간 우리도 무리 지어 마구 질주하고 있습니다. 13인의 아해와 뒤섞여. 시는 해석하기 나름이라지만 해석에 앞서 시에 대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를 만날 수 있는 입구를 찾은 것이지요.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입구를 찾은 것만도 훌륭한 일이지요. 게다가 이상 문장의 독특함을 맛보았습니다. 이처럼 와구와구 소리 내어 읽는 시간은 마치 문장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시간과도 같습니다. 실제로 입과 혀, 턱이 움직이면서 우리는 문장을 읊어대는 동시에 씹어보고 있습니다. 가끔은 어느 부분을 강하게 물어 뜯어보기도 하지요. 그렇게 맛보고 즐기는 법을 터득해갑니다.


고기도 씹어본 사람이 먹을 줄 안다고, 문장도 맛본 사람이 읽을 줄 압니다. 이런 경험이 축적될 때 낯선 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이질적인 문장을 만날 때에도 주저하지 않고 달려들 수 있습니다. 문장을 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독서의 맛을 비로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이 말도 이해할 수 있겠지요.


삼일 동안 글을 읽지 않으면 말에 맛이 없다.(三日不讀書語言無味)

입으로 실컷 글을 맛보았다면 이제 손으로 문장을 옮겨볼 차례입니다. 쓰기, 그대로 옮겨 쓰는 필사筆寫는 또 그대로 훌륭한 미덕을 지니고 있습니다. 글과 대면하는 고유한 시간이라고나 할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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