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역사문화기행 3기 #5
중국은 땅덩이가 넓은 나라이지만, 깊은 나라이기도합니다. 저 깊은 땅속에 있던 옛 유물이 갑자기 튀어나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일이 종종 벌어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는 조조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해서 떠들썩했던 일이 있습니다. 천년 넘게 잠들어 있던 무덤이, 그것도 역사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사람의 무덤이 발견되는 일은 흥미진진한 사건이지요.
헌데 생각지도 않게 이런 멋진 일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시황릉의 병마용이 발견된 일이 대표적이지요. 사건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 우연히 커다란 흙인형들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한 물건이다 싶었는데, 나중에는 엄청나게 많은 흙인형들이 잔뜩 모여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지요. 훗날 병마용兵馬俑이라 부르는 유물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알리게 됩니다.
'용俑'은 본디 인형을 뜻하는 말입니다. 다만 사람이 가지고 노는 인형이 아니라, 죽은 사람의 무덤에 같이 묻는 인형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좀 차이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죽으면 주변 사람들을 함께 무덤에 묻었다고 하지요. 바로 순장殉葬이 그것입니다. 헌데 옛날 사람들도 무덤에 함께 들어가는 일을 기꺼워할 리 없습니다. 나중에는 사람을 대신해 인형을 함께 묻습니다.
옛 무덤을 보면 여러 종류의 인형이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것도 있고, 돌로 만든 것도 있습니다. 한편 흙으로 만든 것도 있지요. 병마용은 토용土俑, 흙으로 빚어놓았습니다. 아무래도 흙이 많고, 비가 적은 지역이라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수많은 병사와 말을 흙으로 빚어놓아 병마용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병마용이 후대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그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끝없이 늘어선 병사들과 말을 보고 있으면 마치 거대한 군대를 맞이하는 듯 압도당하게 됩니다. 또한 이 무덤의 주인, 진시황의 권력의 압도적인 권력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지요. 무려 20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의 위세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니 대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마오쩌둥>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의 부제가 재미있습니다. 'The Man Who Made China', '중국을 만든 사람'이랍니다. 그만큼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는 뜻이겠지요. 오늘날의 중국, 중화인민공화국을 만든 사람이라면 마오쩌둥을 꼽겠지만 보다 큰 의미의 '중국'을 만든 사람이라면 누구를 꼽아야 할까요? 저는 진시황을 꼽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진시황秦始皇은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처음 황제라는 호칭을 만든 인물입니다. 이른바 천하통일을 이루어 전국시대의 혼란을 잠재운 뒤 그는 다른 호칭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이전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호칭 '왕王'은 자신의 업적을 설명하기에 부족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이에 신하들을 불러 모아 좀 생각을 내놓으라 주문합니다.
<사기 진시황본기>를 보면 이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신하들은 군주를 부르는 새로운 호칭으로는 '태황泰皇'을, 군주 스스로를 가리키는 새로운 호칭으로는 '짐朕'을 제안합니다. 진시황은 '짐'이라는 표현은 받아들이지만 '태황'은 거절합니다. 더 나은 호칭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진시황은 스스로 '황제皇帝'라는 호칭을 짓습니다. 이는 각각 '삼황三皇'과 '오제五帝'에서 따온 표현을 합쳐 만든 것이지요. 삼황과 오제는 전설로 전해지는 신화적인 통치자들입니다. 이들에 버금가는, 아니 이들보다 더 뛰어나다는 생각에서 '황제'라는 호칭을 만들었습니다.
본디 중국에는 '시법諡法'이라 하여, 임금이 세상을 떠나면 그 공적에 따라 호칭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임금의 이름은 모두 그렇게 사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 바람에 똑같은 호칭이 많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태조'라는 호칭은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습니다. 보통 나라를 연 임금에게 붙이는 호칭인 것이지요. 한편 못된 임금의 경우에는 영 좋지 않은 호칭을 얻고는 합니다. 려왕厲王이나 유왕幽王이 대표적입니다. '려'는 사납다는 뜻이, '유'는 어리석다는 뜻이 있습니다. 또한 제대로 황제 노릇을 못한 경우에는 소제少帝라는 호칭을 얻기도 합니다. '소少', 적다는 표현에는 보잘것없다는 뜻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진시황은 이런 전통이 영 못마땅했습니다. 진시황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를, 신하가 군주를 평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물론 임금의 호칭을 정하는 데는 신하와 후대 임금의 뜻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백성의 평가도 무시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진시황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말합니다. 황제라는 새로운 자리를 마련한 그는, 당대는 물론 후대 사람들에게도 평가받지 않겠다고 당당하게 선언합니다. 따라서 시법을 없애기로 합니다.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그는 스스로를 시황제라 칭합니다. '시始'는 시작한다는 뜻이지요. 첫 번째 황제니 시황제라 부르고, 이후에는 이세二世황제라 부르면 될 것이라 말합니다. 이어서 삼세, 사세, 오세... 그렇게 만세萬世까지 이어지면 될 거라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그의 바람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의 나라, 진秦은 진시황이 세상을 떠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집니다. 그는 신하보다 자신이 더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다 생각했지만, 그를 이어 황제에 오른 이세황제는 환관의 농간에 이리저리 휘둘립니다. 지록위마의 주인공이 바로 이세황제이지요. 결국 진나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만세萬世토록, 영원을 꿈꾸었던 진시황의 제국은 그렇게 힘없이 무너집니다. 기간만 따지면 역대 중국의 통일왕조 가운데 어디에 명함을 내밀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을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진시황이 만든 황제라는 자리는, 20세기 초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에 이르기까지 2,000년이 넘게 지속되었습니다. 한편 오늘날 중국을 이르는 China라는 이름은, '진秦qīn'에서 따온 이름이기도 합니다.
진시황은 줄곧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분서갱유焚書坑儒, 책을 불사르고 유학자들을 산채로 파묻었다는 이야기는 그의 잔혹한 일면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평가가 너무 평면적이며,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찾아보면 그를 다르게 그려내는 작품들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시황제'라는 호칭을 만든 그의 당당함이 매력적이라 생각합니다. 후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던 그는 상관하지 않았을 테지요. 그는 후대 사람들의 평가에 휘둘리는 사람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만세萬世를 가는 제국을 꿈꾸었던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피하는 법도 찾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도 무덤 속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어요. <사기 진시황본기>는 그의 참혹한 죽음에 대해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천하를 모두 무덤 속에 가지고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는 없었지요. 그래도 수많은 군대를 함께 데리고 갈 수는 있었습니다. 자신의 무덤 앞에 늘어선 병마용을 보며 그는 흡족했을까요? 아니면 황제에 걸맞지 않은 규모라며 분노했을까요? 살아있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