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인문학서당 '나는봄'의 글쓰기
우리는 늘 참된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참된 사람의 자질이자 특징이 무엇인지, 또 그 기준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참된 성품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자. 우리는 모두 관계라는 틀에 갇혀 타인의 시선 속에 비칠 수밖에 없다. ‘난 아니야. 난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아.’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 타인에게 악한 사람으로 비치기보다는 선하고, 진실된 사람으로 비치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가? ‘참된 인간’이라는 고정관념에 얽매여 그렇게 되어야 하는구나, 다른 사람에게 진실하고 선한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좋구나, 하며 자신을 포장해왔던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모두 같은 본성 즉, 선한 본성을 타고 태어났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애초에 타고난 본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누구도 선하거나 악한 본성을 타고 태어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타인을 괴롭히고, 그 괴로움을 보고 즐기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를 보면 인간이 악한 존재로 보인다. 한편 불쌍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거나, 고통받는 사람을 돕는 모습을 보면 인간은 선한 본성을 타고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렇듯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정의 내릴 수는 없다.
맹자의 성선설에 따르면, 그 본성이 더러워지지 않도록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세상에 나왔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갓난아기가 악한 것이 무엇인지,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렇기에 맹자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분명히 선과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살아가며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전부 적절히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한 것만 따르며 살아가는 삶은 어쩌면 재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악한 것만 취하면 그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갈 것이다. 이 둘을 적절히 잘 합해본다면 정말 완벽한 삶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힘들게 일하고 온 아버지가 술을 마시며 하루의 피로를 푸시고 오히려 위로를 받는 것처럼 말이다. 비록 그 술은 누군가를 해하도록 만들고, 무의식 중에서 삶에 대한 불평을 꺼내도록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깨끗하고 선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부러움을 받기를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애초에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개개인의 특성이 전부 다른 수많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늘 올곧고, 진실된 삶은 있을 수 없다. 새하얀 거짓말, 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는가. 여러 사람들과 살아가면서 원치 않을 때에 악한 일을 저질러야 할 때도 있다. 수많은 선과 악의 선택의 기로에 서있게 되는 것이다.
당장 현실을 봐도 그렇다. 대입을 위해서 우리는 끝없이 경쟁해야만 한다. 바로 옆에 있는 친구의 위에 올라가야만 내가 원하는 삶의 첫 단추를 끼울 수 있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고, 심지어는 그들을 밟고 올라서는 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 상황에 크게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오히려 공부 걱정 없이, 편하게 사는 친구를 보면 후회할 거라고, 사회의 낙오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경쟁자를 줄였다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내 주위의 친구들이 참된 인간이 되겠다고 매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한 대입만이 살길이라고 대입에만 매달리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참된 인간이 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 누군가 꼭 진실되고 선한 사람이어야만 한다고 정해놓은 것이 아니다. 대학교도 안 가도 좋다. 대입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을 조금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일 뿐이지, 꼭 대입이 아니어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 자기소개서에 채워 넣기 위해 억지로 만든 꿈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꿈을 가지고 미래를 고민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다시 한번 진심으로 자신을 되돌아봐야 할 시기가 온 건 아닐까.
* 서울사대부고 선농인문학당에서 쓴 글입니다.
* <오늘을 읽는 맹자>를 읽으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