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인문학서당 송암의 글쓰기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오래도록 질문한 논제였다. 세계의 철학자들, 지식인들은 이 문제를 두고 때로 우아한 화술로, 격렬한 대담으로 그 답을 찾아나갔다. 그 가운데는 이처럼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다.
최고신 제우스가 바람을 피워 디오니소스를 낳는다. 이를 질투한 헤라는 두 거인을 사주해 디오니소스를 죽인다. 거인들은 디오니소스를 먹으면 불사不死할 수 있다는 말에 사지를 찢어 디오니소스를 죽이고 그를 먹어버린다. 제우스는 번개로 거인들을 태워 죽이고, 남은 심장으로 디오니소스를 부활시킨다. 그리고 죽은 거인들의 재와 그들이 먹었던 디오니소스의 유해를 섞어 인간을 창조한다. 이렇게 탄생한 인간은 충돌하는 두 가지 본성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신을 살해한 거인의 유해에 깃든 악한 본성이고 나머지 하나는 디오니소스의 유해에 깃든 신의 선한 본성이다.
이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의 오르페우스교에서 전승된 신화이다. 『맹자』「고자」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본성’과 비교해 보면 서로 닮은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두 이야기 모두 인간의 본성 속 ‘선악’에 대단히 신경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그 해석이 다르다. 맹자는 ‘선’을 인간이 타고난 본성으로 보았다. 본성은 ‘선’하나 이를 수양하고 돌보지 않아 ‘악’해진다는 것이 「고자」에서 맹자가 내세우는 견해다. 그에 반해 앞의 신화는 인간 본성에 선과 악 모두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오르페우스교의 신화, 맹자의 성선론 모두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과연 인간에게 ‘본성’이 그리 큰 중요성을 지닐까? 이후에도 수많은 철학자들이 계속해서 논쟁을 벌일 정도로? 어째서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질적인 성품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것으로 무얼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인가?
맹자는 ‘선함이 인간이 천성적으로 타고난 성질’이라 말하면서 네 가지 단서, 인의예지를 말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맹자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인간상과 사회상에 ‘인간의 본성’을 끼워 맞추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그의 주장은 ‘본성’이 이러하기에 인간은 그 ‘본성’을 이러저러하게 수양하고 ‘성인’이라는 훌륭한 인간상으로 완성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귀결된다. 종교에서 설명하는 인간의 본성 또한 비슷하다. 오르페우스 신화가 이야기하는 인간의 본성 또한 오르페우스교가 추구하는 이상을 이야기하기 위한 전제였다. 오르페우스교는 신에게서 왔다는 선한 본성을 갈고닦아 불멸하는 삶을 얻으라고 이야기한다. 맹자와 오르페우스교는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대신 ‘그 본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주목하고 있다.
이를 보면 ‘본성’은 그들의 철학적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보인다. 그 전제조건을 탄탄히 하고자 그토록 인간의 ‘본질’에 집착을 보였던 것이다. 무엇 때문에 우리들까지 철학자들의 집착을 따라야 할까. 흔히 이렇게 묻는다. ‘어떤 철학자는 이런 식으로 이런 철학자는 저런 식으로 인간의 본성을 논했다. 그러면 너는 인간의 본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새롭게 생각해보자. 본성 자체보다 철학자들이 왜 그토록 인간의 본질적인 요소에 집착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본성에 대한 질문에서 벗어나 우리가 살펴야 할 인간의 모습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재 진행형인 인간의 삶과 그 속의 행동 자체이다. 인간이 본래 어떤 본성을 지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고 삶을 헤쳐 나가는 모습이 우리가 주목해야 할 참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이제, 철학자들이 짜 놓은 본성론의 틀에서 벗어날 시간이다.
* 서울사대부고 선농인문학당에서 쓴 글입니다.
* <오늘을 읽는 맹자>를 읽으며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