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실에서는 어제부터 세미나를 시작했습니다. 꽤 오랜만에 만나는데,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게 즐겁기도 낯설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사회적 거리두기'로 '책과 거리두기'가 되지 않았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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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까지 사업계획서를 쓴다고 정신없이 살았더니 사업계획서 작업 능력을 얻는 대신 책읽는 능력을 조금 널어낸 듯합니다. 번역 작업 중인 책의 색인 작업을 해야 하는데, 글을 들여다보는 걸 온몸이 거부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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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은 <주희, 논어를 새롭게 읽다>가 될 듯합니다. 막바지 작업이니 곧 책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겠습니다. 요즘 느끼는 건데, 내가 쓴 글이 낯섭니다. 문장들이 도무지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때가 많습니다. 낯설어 제가 쓴 글이 반갑기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썼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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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평가, 번역에 대한 평가는 소수의 독자에게 맡겨야겠습니다. 때로는 한 없이 못나보이고, 때로는 한 없이 멋져보이는 바람에 쉬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후자에 조금 기울고 있습니다. (... 으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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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보기' 작업을 하는데 눈이 빠질 것 같습니다. PDF파일에 OCR로 입혀져 있어 검색하면 되는데, 그냥저냥 쉬운 일은 아닙니다. 번역보단 단순한데, 꼼꼼하려니 시간이 꽤 걸립니다. 게다가 이 책의 저자는 왤케 상세하게 '찾아보기'를 붙여 놓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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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능률이 오르지 않아 가끔은 우울한 마음도 듭니다. 전업으로 오로지 이 작업에 몰두하면 좋을 텐데. 올해 삶의 꼴을 보니 '전업연구자', 혹은 '전업작가'의 삶은 멀어 보입니다. 아침이나 낮에는 이런저런 사업에 시간을 들이고, 저녁에 잠깐 짬을 내어 글을 정리하는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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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이 부끄러울 때마다 핑계 거리를 생각하기도 합니다. 글쓰고 공부하는데만 시간을 들이면 낫겠는데 하고. 하긴 핑계 거리를 생각하면 끝도 없습니다. 밥하기, 청소하기 등을 하지 않으면 더 훌륭한 연구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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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대다수의 연구자는 구질구질한 일에 시간을 들이지 않습니다. 반찬거리 고민할 일도 없고, 무슨 무슨 사업에 시간과 정신을 빼앗길 일도 없겠습니다. 하긴, 어떤 연구자는 번역 작업에 '찾아보기' 정도는 누구에게 맡기기도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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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직업이 여러 개인 것으로 생각하자며 마음을 다독입니다. 투잡, 쓰리잡 정도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일일이 이름붙일 말을 찾지는 못해 그렇지 그렇게 생각해도 크게 잘못된 건 아니겠습니다. 직업이 많다고 생각하니 그새 부자가 된 기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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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아려보니 올해는 아직 한푼도 벌지 못했습니다. 일거리도 없고, 세상이 시끌벅적해 더 그렇습니다. 그래도 작년에 모아둔 게 있어 버티고 있습니다. 사실 씀씀이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고. 다만, 봄이 되고 크고 작은 수입이 생기면 한번 수입의 비율도 한번 헤아려보겠습니다. 다중 직업자(!)의 생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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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의 배신>을 읽었습니다. 국가가 조세를 위해 단일 작물을 재배하도록 만들었다는 저자의 통찰이 흥미로웠습니다. 작은 먹거리, 다양한 생산물을 수렵채집하는 '오랑캐(책의 표현은 야만인)'는 국가에 지배당하지 않았다 해요. 국가에 삶으로 저항하는 자들. 수렵채집의 밀렵꾼들. 저도 그들처럼 이것저것 줍고 잡으며 살아야지 다짐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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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모두 오늘날 '공유자원'이라 불리는 것 즉 사회 구성원 전체가 접근권을 갖는 자유생활(독립생활) 식물, 동물, 수생생물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쉽게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중앙에서 독점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단일한 지배적 자원이 없었다. 이들 지역에서 생계를 유지한 방식은 매우 다양하고 가변적이고, 그 주기 또한 다중적이어서 그 어떤 집중화 시도에도 저항할 수 있었다." <농경의 배신> 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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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스스로의 안전과 상대적 풍요를 보장하는 최선의 방법은 주변에 풍부하게 존재하는 다양한 자원을 골고루 활용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단일한 기술이나 식량 원천에 특화되기를 피할 수 있는 역량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농경의 배신>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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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용의 기술과 다양성의 역량!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밀렵'이야 말로 흥미로운 삶의 기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글과 같은 이 도시의 생활자도 밀렵의 기술을 연마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하여, '밀렵연구자'. 나름 멋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