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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는 무엇으로 사는가

by 기픈옹달
선생님의 직업은 어떻게 되십니까?

선거를 앞두고 몇 차례 여론조사 업체의 전화를 받았다. 사는 곳, 성별, 연령 따위를 고르고 나면 어느 정당을, 혹은 어느 후보를 지지하는지 따위를 묻는다. 귀찮은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라를 위한다는 생각에 가만히 앉아 질문을 들으며 번호를 눌러준다. 한 번은 성별과 나이를 묻더니 바로 끊어버리더라 필요한 표본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끝까지 물어주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그러다 꼭 마지막에는 직업을 묻더라. 끝까지 들어도 나에게 걸맞은 항목을 찾기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 고르는 것이 '기타'. 어딘가의 설문에는 '학생, 주부, 기타'를 함께 넣어 분류해 두었더라. 실상 직업으로 보기에는 힘든 항목. 어딘가에서 따박따박 나오는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밥벌이보다는 밥을 얻어먹거나 밥을 하는 사람. 어쨌거나 밥벌이하는 사람은 아닌 기타 등등의 존재들. 문득 '기타'에 백수를 넣어주면 고맙겠다 싶다.


백수白手, 흰 손이라는 뜻인데 특별히 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농부는 손에 낫을 쥘 것이고, 광부는 망치를, 노동자는 연장을, 자본가는 화폐를! 백수는 희고 말랑한 손바닥만 가졌다. 요즘이야 손에 마우스나 스마트폰을 쥐고 있겠지만 전통적으로 제 일감에 맞는 연장을 손에 쥐지 못한 사람을 백수라 일컬었다. 고상한 말로 하면 생산도구를 가지지 못한 존재라고나 할까?


스스로를 백수라 부르니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으면서도, 뭔가 이상하다. 백수인데 왜 이렇게 바쁘지? 오늘 하루만 돌아보아도 그렇다. 아침에 일어나서 조금 게으름을 피우다가 청소기를 돌렸다. 글을 쓰다가 아이와 점심을 차려 먹었고, 점심 먹고는 연구실에 나와 글을 마저 완성했다. 그다음에는 세미나, 약간의 수다와 저녁식사. 그리고 다시 세미나를 마치고 돌아오니 한밤이다. 저녁상을 차리지 않았는데도 하루가 금방 지났다.


내일 해야 할 일도 많다. 밀린 서류도 정리해야 하고, 금요일 마감하는 공모사업 사업계획서도 써야 하고, 공간을 꾸미면서 어지럽혀진 짐들도 정리해야 하고, 책들도 가지런히 다시 꽂아야 하고... 여느 날처럼 청소기도 돌리고 저녁상도 차리고 그러다 보면 또 하루가 훌쩍 지나겠지.


그러고 보니 밥벌이하지 않은 존재들은 늘 바빴다. 학생은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하루를 보내고, 주부는 치우고 차리고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기타 등등도 저마다 퀘스트와 인연 활동에 시간을 쏟다 보면 하루가 금방이다. 내 주변에도 태반이 백수인데, 약속을 잡으려 해도 저마다 할 일이 많아 시간 잡기도 힘들다. 그러니 백수란 헐렁하고 느긋한 옷이 아닌, 몸에 꼭 맞는 옷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하는 일이 많은데 무슨 백수냐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잘한 일을 많이 하니 적당한 이름표를 찾지 못해 백수라 부르는 거다. 오늘 나의 하루를 보아도 주부, 학생의 삶도 있고, 작가, 연구자, 활동가의 시간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도 딱히 어울리는 게 아니니 게 중에 무엇을 골라도 낯설다. 다르게 말하면 이것저것 되는대로 스탯을 찍는 바람에 어디로도 전직하지 못한 기본캐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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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책을 보았다. 제목은 '연구원은 무엇으로 사는가' 나름 연구자라 자처하는 삶이라 확 나의 눈길을 끌었는데, 상세히 보니 영 나와는 다른 삶이다. 대기업 연구소의 연구원의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란다. 금세 흥미를 잃었다.


예전부터 나 같은 삶을 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름 관찰해보고 기록해보아도 좋을만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두루두루 돌려보며 참조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줌 밖에 안 되는 기타 등등의 삶에게는 뭔가 전하는 것이 있겠지. 아니면 희귀종, 보호종이라 하여 뭇사람들의 환호를 받거나.


여튼 시간이 되는 대로 하나씩 정리해볼 요량이다. 나를 일컫는 말들을 찾는 방랑기라고 해도 좋고, 기타 등등으로 살아가는 생존기라고 해도 좋다. 아니면 그냥 아주 사적인 기록이기도 하고. 관건은 얼마나 솔직할 수 있느냐 하는 것. 제 삶을 어디까지 이야기할 수 있을까. 살림살이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일은 좀 두렵기도 한 일이다. 허나 또 잘 알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지켜볼 것처럼 생각하는 것도 부질없는 것임을. 누가 본다고 벌써부터 걱정을 하는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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