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밥 같은 세입자

by 기픈옹달
해방촌 뭐 이상한 단체 아니야?

언젠가 십여 년 만에 한 친구와 연락이 닿았다. 어디 사느냐는 질문에 해방촌이라 답했더니, 무슨 이상한 단체나 동네에 살고 있는 건 아니냐 되묻더라. 아마 신앙촌과 헷갈렸을 테다. 무슨 엉뚱한 소리냐며 웃어넘겼으나, 나중에 알고 보니 신앙촌(천부교) 박태선이 있었던 전도관이 아직도 해방촌 구석에 남아 있더라. 그러니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요즘은 해방촌에 산다고 하면 '힙한 동네'에 산다는 말을 듣는다. 경리단이 코앞이고,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이태원이 바로 곁인 데다, 요즘은 무슨무슨 드라마 촬영지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요 며칠 전에도 커다란 촬영 트럭이 좁은 길을 막고 서 있었다. 요즘에는 대놓고 '촬영 문의'라는 안내문을 문에 붙여놓는 가게도 있을 정도다.


십수 년 전, 해방촌에 처음 올 때만 해도 지금과 영 분위기가 달랐다. 마을버스를 타고 좁은 길을 올라가는데, 마치 무슨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듯했다. '남산 아래 첫 마을'이라는 별명처럼, 남산 바로 아래 위치한 바람에 지대가 높은 동네지만, 그때는 정말 어디론가 기어들어가는 듯했다. 낡고 누추한 거리, 좁은 골목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였다.


당시 나는 이화동, 그러니까 대학로 근처에 살고 있었다. 밤마실을 나가면 대학로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흠뻑 젖을 수 있었다. 그 전에는 경복궁 옆 사간동에 살았다. 북촌으로 밤 산책을 나가면 도시 전체가 잠에 빠진듯했다. 그러나 해방촌은 북촌이나 대학로와도 영 달랐다.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은 늘 어두웠으며, 다닥다닥 붙은 집들에 사는 사람은 어찌나 많았는지.


그렇게 굴러굴러 해방촌에 정착한 지 십 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집을 네 차례 옮겼다. 헤아려보니 올해 다섯 번째 집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늘 그렇듯 재계약은 건물주의 손에 달려 있다. 그나마 마음을 놓고 있는 것은 'LH 신혼부부전세임대'로 계약이 되어 있기에 터무니없는 일은 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 일은 또 모르는 법.


변화 많은 동네에 살다 보니 어느 날 훌쩍 가게가 사라지고, 건물이 헐리고 하는 모습을 본다. 세탁소였던 곳이 간판은 세탁소인데 카페가 되었다. 브로콜리를 '보리꼬리' 따위로 써놓았던 야채 가게는 카페로 변하더니, 이제는 영화사가 들어온단다. 가끔 꽃다발을 사던 꽃집은 문을 닫고 사라졌는데, 그 자리는 아직도 텅텅 비어 있다.


뭐 건물주가... 꽃집이 문을 닫기 이틀 전이었나, 꽃집 사장님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임대료 때문에 꽃집을 정리하는 듯했다. 마지막 날 다시 인사를 하겠다했는데, 결국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가끔 오가며 보던 밝게 웃던 꽃집 사장님을 지금은 만날 수 없다. 그래도 인사라도 나눈 것은 운이 좋은 편이다. 예고도 없이,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사람도 공간도 사라지는 일이 많다.


IMG_5076.JPG
IMG_5077.JPG



'카페 김동률'이라는 간판을 처음 보았을 때 사실 살짝 놀랐다. 연예인들이 해방촌에 손을 댄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였다. 혹시 가수 김동률이 카페를 낸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카페 사장님의 이름이 김동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제가 김동률입니다. 수염이 덥수룩한, 낮고 굵은 목소리의 사장님은 그렇게 인사를 했다.


가끔 오가며 커피를 마셨다. 나는 개인적으로 다른 카페의 커피를 좋아했는데, 한 친구는 이 카페의 커피가 더 좋다 했다. 여름이면 여기서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들고 찾아오곤 했다. 나는 사실 커피보단 맥주를 좋아했다. 기네스를 생맥주로 마실 수 있는 곳이었다. 거품이 뒤섞여 컵 안에서 들끓고 있는 모습을 보면 세상을 다 가진 듯 뿌듯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기네스 맥주를 앞에 두고 꺼이꺼이 울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수유너머라는 이름과 이별해야 했을 때 즈음이었다. 삶에 뿌리를 뽑힌 듯, 막막함을 토로하며 목놓아 울었다. 새롭게 공간을 꾸리자며 의기투합한 이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눈 곳도 그곳이었다. 사장님이 우리 이야기를 다 알겠다.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고 나와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수 차례 드나들며 나름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귀를 쫑긋 세웠다면 속속들이 사정을 다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카페 이층에 또 카페가 생겼다. 어찌 된 일이냐 물었더니 그 낮고 굵은 목소리로 사장님이 열변을 토했다. 상도덕이 없는 거 아니냐고. 카페 위에 또 카페를 하는 일이 어디 있느냐고. 게다가 카페를 차렸다는 사람은 가게를 제대로 돌보지도 않는단다. 몇 달째 그냥 비어 있다는 말씀.


카페 김동률 이전에 거기는 약간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가게였다. 구조도 좀 기이했는데, 아마도 작은 집을 수리해 가게로 만든 모양이라 그랬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턱이 높은, 아마도 방으로 쓰였을 공간도 있었다. 카페 김동률로 바뀌고는 작은 다락과 같은 곳이 되었다. 함께 공부하는 청소년들과 거기서 소박한 종강 파티를 가지기도 했다. 우리들끼리의 비밀 이야기를 나누기에 딱 적당한 그런 곳이었다.


카페의 넓은 소파에 앉아 밖을 보며 오가는 동네 사람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였다. 소파 옆 한쪽에는 책이 꽂혀 있었는데 태반이 낡은 책이었다. 게 중에는 <마계마인전>도 있었다. 무슨 괴이한 제목의 책인가 싶지만, <로도스도 전기>라는 제목으로 유명한 판타지 소설의 초기 번역본이다. 그 낡은 책을 보고 어찌나 반가웠는지. 넉넉하니 여유가 있는 날이면 언제가 카페에 처박혀 책이나 읽겠다고 했는데.


짬을 내지도 못하고 몇 년이 흘렀고, 어느 날 갑자기 카페가 문을 닫고 말았다. 어찌 되었을까. 한참이나 문을 닫고 있더니 새롭게 말끔한 카페로 바뀌었다. 어느 날 시간을 죽이러 새로 들어앉은 카페에 앉아 보았다. 분위기도 커피 맛도 영 내 취향과는 아니었다. 예전 카페 김동률이 조금은 정겨운 공간이었다면, 새로 자리한 카페는 좀 세련된 맛을 추구하는 곳이 되었다.


TV에서 갑자기 카페 사장님의 소식을 만났다. 카페를 접고 택배일을 한단다. 건물주가 임대료를 높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가게를 접었다고.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단다. 오랜만에 해방촌을 찾은 그의 뒷모습이 참 쓸쓸하기도 했다. 임대료는 얼마나 올랐을까. 권리금은 좀 받을 수 있었을까. 짧은 순간이었지만 방송을 통해 큰 상실감을 마주하게 되었다. 공간과 사람이 사라질 때 의도치 않은 망각을 강요당한다는 것.


방송의 제목은 '연예인과 갓물주',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도 모자라 이제는 '갓물주'라는 말이 되었다. 건물을 사고팔며 이익을 챙기는 사람들. 누구는 이를 투자라 부르고, 누구는 이를 개발이라 부른다. 어느 건물이 팔렸네 하는 말을 들으면 누구는 또 무슨 가게가 사라지겠구나 생각하지만, 또 누구는 집값이 올라 쾌재를 부른다. 그렇게 동네가 들썩이는 동안 세입자들의 삶은 파고를 모르고 출렁인다.


돌아보니 동네가 참 많이 바뀌었다. 동굴 같던 동네가 이제는 서울을 굽어보는 동네가 되었다. 모습을 바꾼 해방촌은 마치 새로 인테리어를 마친 것처럼 말끔하다. 오늘도 해방촌 어딘가에서는 드릴 소리와 톱질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또 어딘가 공사를 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투닥거리는 공사장 옆에 먼지와 톱밥이 폴폴 날린다.


문득 나는 톱밥 같은 세입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이 새롭게 바뀌면 우수수 떨어지는 톱밥처럼 뒤늦게 발견되는 존재는 아닐까. 갓물주가 동네를 들썩여야 사람들은 그 동네와 삶들에 눈길을 준다. 힙한 동네 해방촌이 아니라 거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그러나 늦어도 한참 늦었다. 톱밥은 바람에 날리고, 물에 씻겨 흘러갈 것이니까. 그나마 남은 건 쓱쓱 빗질로 쓰레기 통으로 버려지겠지.


동네가 또 한 번 바뀌면, 더 말끔히 바뀌면, 누군가의 욕망처럼 이태원 클라쓰의 바람을 타고 경리단 클라쓰와 해방촌 클라쓰가 동네를 탈바꿈시키면 해방촌이라는 구닥다리 이름도 사라질지 모른다. HBC 빌리지 아니면, 리버레이션 타운 따위가 되지 않을까? 그날 톱밥 같은 세입자들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오늘도 대화 속에 떠나간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는 어디로 가고 누구는 또 어디로 가고.


나도 그렇게 되는 날이 있겠지. 카페 사장이 택배 기사가 되었는데, 그날 나는 또 무엇을 하고 있을까? 영 새로운 일을 하고 있겠지. 그래도 톱밥 같은 세입자라는 꼴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테다. 그러니 부디 바람이 크게 불지 않았으면, 행여 바람이 불어 폴폴 날려 새로운 곳에 앉더라도 좀 바람 잦은 곳이기를...


https://www.youtube.com/watch?v=O92xRQqVe6M&feature=youtu.be&t=1197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백수는 무엇으로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