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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May 07. 2020

그래, 어쩔 수 없는 거야

삶과 죽음, 존재와 소멸에 대하여

부모 탓일까?
사람 때문일까 하늘 때문일까?
뭣 때문에 이리도 고달픈 걸까.
골똘히 생각해도 알 수가 없네.

부모가 어찌 내가 가난하길 바라겠나.
하늘과 땅은 모두를 품어준다니
하늘이 나를 가난하게 한 것도 아니겠지.
이유를 찾아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네
그런데도 이리 고달픈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


<덕충부>의 마지막 이야기. 자여가 자상을 찾아간다. 열흘이 넘도록 장마비가 내리는 바람에 자상이 걱정되었던 까닭이다. 하여 친절한 자여씨는 도시락을 싸들고 자상의 집을 찾는다. 자상의 집에 도착하니 자상의 노래가락이 들리는 게 아닌가. 신세를 한탄하는 그의 노래에 자여가 묻는다. 어찌 그리 불평이냐고. 자상은 삶이 이리 고달픈 까닭을 찾아보려 한단다. 도대체 왜 이리 가난한 걸까?


가난(貧)이란 장자의 시대에도 오늘날에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한날한시에 태어났어도 누구는 곳간에 양식이 썩어나도록 풍족하게 살며, 누구는 입에 풀칠하기도 버겁다. 이에 대해 저마다 다른 진단을 내놓을 것이다. 누군가는 이를 불평등이라 부르며, 누군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누군가는 무도하기 때문이라며, 윤리 도덕이 땅에 떨어져 버렸기 때문이라 할 것이다.


이들의 날카로운 진단은 저마다의 해법을 내놓기도 한다. 분배의 정의, 혹은 상호를 배려하는 공동체 정신 등등. 그러나 장자에게는 그러한 탐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가난이란 어찌할 수 없는 것, ‘명命’이라 말한다. 그 까닭을 찾아보아도 알 수가 없다는 난감한 대답과 함께. 따라서 장자가 문제의 해결에 별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패배적인 혹은 순응적인 인물이라 손가락질받는 것도 일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다시 장자에게 돌아와, 그는 어째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까? 이를 위해서는 <장자>의 다른 우화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장자가 감하후라는 인물에게 곡식을 꾸러 갔다는 이야기. 감하후는 장자를 기꺼이 돕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곧 세금을 거두어들일 테니 기다리면 삼백금이라는 막대한 돈을 줄 수 있겠다고. 이 반가운 말에도 불구하고 장자는 돌연 화를 버럭 낼뿐이었다. 대체 왜?!


장자가 오는 길에 수레바퀴 자국 고인 물에 퍼덕이는 붕어를 한 마리 보았단다. 목숨을 구걸하는 붕어에게 장자가 이렇게 말했다지. 내가 남쪽으로 가는 길이니 어서 가서 강물의 방향을 틀어 보겠다고. 그러면 다시 강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붕어가 장자에게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 말라죽을 판에 물 한 바가지만 있으면 되겠는데, 강물을 끌어다 주겠다니! 그걸 기다리다간 어물전에서나 나를 찾을 수 있겠소!!


장자에게 필요한 것은 삼백금의 막대한 돈이 아니라 그저 허기진 배를 채울 곡식 한 되뿐이었다. 주리고 주린 배를 움켜잡고 찾아온 사람에게 삼백금을 줄 테니 기다리라는 말은 얼마나 허망한가. 아니, 장자나 붕어가 그랬던 것처럼 얼마나 화가 나는 일인가. 설사 천하를 구원할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가난한 이를 구제할 방법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날이 오기 전에 굶어 죽을 사람이 수두룩할 테다. 


장자가 진단과 해법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바로 지금 당면한 고통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다. 가난이란, 삶의 고달픔이란 매우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문제인 까닭이다. 사회나 국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만 장자에게는 한 덩이의 밥이 더 중요하다. 그는 가난이 개인의 삶을 얼마나 옥죄는지, 삶의 벼랑 끝에 선 그 절실함을 잘 알고 있다. 


열흘이나 넘도록 큰 장마비가 내렸으니 자상은 오가지도 못하고 집에 처박혀 쫄쫄 굶었을 것이다. 열흘 동안 굶은 배로 세상의 이치를 탐구한들, 세상의 부조리를 따져본들 무슨 의미일까. 친구인 자여가 가져온 밥 한 덩이가 더없이 소중했을 것이다. <장자>에 기록되지 않은 그 뒷 이야기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자여가 가져온 밥을 먹으며 자상은 시름을 놓았겠지. 아마도 슬픈 노래 가락은 치우고 함박웃음으로 한 끼를 배부르게 먹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을 맺지는 못했을 테다. 장자가 가난한 삶을 비유한 뭍에 나온 물고기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대종사>에서 장자는 뭍에 나온 물고기들이 진흙탕 위에서 퍼덕이며 거품을 내뿜어 서로를 적셔준다고 말한다. 강과 호수에서는 서로를 생각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당면한 현실은 그토록 절박하다. 자여가 가져온 도시락은 오늘 하루의 배고픔을 잊게 해 줄 뿐이었다. 뻐끔, 곁의 물고기가 잠시 적셔준 것처럼. 운이 좋아 비라도 내리지 않으면, 물고기가 직면할 현실은 자명하다. 곧 말라죽고 말겠지.


장자가 그리는 현실은 이처럼 꿈도 희망도 없는 참혹한 상황이다. 각각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내던져있다. 무엇이 그렇게 생각하게 만들었을까. <덕충부>에서 거듭 반복되는 생사生死, 곧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장자의 생각을 엿보도록 하자. 그는 모든 존재가 삶과 죽음의 과정에 놓여 있다고 본다. 문제는 삶(生)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 버렸고, 죽음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결과로 시시각각 닥쳐온다는 점이다. 


또 다른 우화에서는 자여와 자상을 떠올리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자사와 자여, 자리, 자래. 이 넷은 삶과 죽음, 존재와 소멸이 함께 있음을 아는 이와 벗하겠다고 말한다. 그렇게 이 넷은 막역지우莫逆之友가 된다. 실제로 마음에 거리낌이 없다는, ‘막역莫逆’이라는 말이 이 우화에서 나왔다. 


안타깝게도 자여가 병이 들었다. 죽을병이 들어 고통받는 자여에게 자사가 찾아간다. 자여와 자사의 대화는 죽음을 앞둔 이 고통 역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러준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손에 내맡겨진 삶이기 때문에 이를 탓할 수 없다. 다만 장자는 그렇게 죽음을 향해 가는 불구가 된 신체도 저마다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라 말한다. “왼팔이 구부러져 닭이 되면 아침을 알려야지. 오른팔이 구부러져 활이 되면 새를 잡아 구워 먹어야지.” 


근대 의학의 발전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았다. 불구가 된 신체도, 삶의 끝자락에 자연스레 망가져가는 신체의 모습도 보기 힘들다. 고통과 질병은 병원 속에 봉인되어 일상에서 마주 칠 일이 없다. 그러나 백색의 병원에 꼭꼭 숨겨두었다 하더라도 질병과 죽음은 누구에게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누구나 죽을 테고, 누구나 몸이 망가지겠지. 고통이란 삶에 착 붙어 있어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삶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사실을 장자는 말하고 있다. 죽음을 맞는다면, 신체가 소멸하는 날을 맞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장자는 어쩔 수 없음을 알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삶의 의미나 죽음의 고결함 따위에 장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는 죽음과 소멸을 어쩔 수 없이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헛헛한 사실과 함께 기괴한 질문을 던진다. 자래가 죽으려 숨이 헐떡일 때 자리가 이렇게 말한다. “훌륭하구나! 조화造化는 또 너를 어떻게 할까? 너는 이제 쥐의 간이 될까? 아니면 벌레의 다리가 될까?”


죽음을 앞둔 친구에게 막역지우가 내뱉는 말이라니! 그는 곧 죽음을 맞을 이에게 위로는커녕 기이한 질문을 쏟아내고 있다. 죽음을 맞으면, 존재가 소멸되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흩어져 무엇인가의 일부가 되겠지. 그것도 꽤 훌륭한 것이 아니라 쥐의 간, 벌레의 다리 따위를 생각한다. 따져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모두가 훌륭하고 고귀한 것이 될 수 있을 리 없으니.


어찌 보면 우습기도 하다. 삶과 죽음을 가로지르는 문제를 어처구니없는 호기심으로 바꾸어버리니 말이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음을 알고 나면, 삶과 죽음이니 존재와 소멸이니 하는 문제를 필멸의 개인이 다룰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엉뚱한 질문도 가능한 일이다. 


하여 질문을 던져보자. 자여가 가져온 밥을 먹고 배를 채운 자상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하면 가난을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고관대작이 되어 기와집에 배불리 먹을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했을 리 없다. 아마도 좀 다른 엉뚱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예를 들면 내일은 또 무슨 노래를 할까 하는 식으로. 골똘히 생사의 의미를 탐구하다 죽음을 맞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인생은 어쩌다 보니 죽음을 맞는 일이 태반일 것이다.


덧: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사람의 말

“하지만 이런 의식은 없었다. 유언장도 쓰지 않았다. 말없이 누워 있었을 뿐이다. 때론 훨씬 절박한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죽는 거구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죽은 순간에는 다를지 모른다. 그러나 살아서 한 번뿐이니 어떻게든 견뎌 내겠지… 나중에 좀 호전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나는, 이런 것들은, 아마 정말 죽기 직전의 상황은 아닐 것이다. 정말 죽을 때에는 이런 상념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도대체 어떠할까는, 나도 모른다.”
<죽음>, 루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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