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자와 호자 그리고 혼돈에 빠진 계함
열자는 아직 배움이 모자란다는 생각에
집으로 돌아갔다.
삼 년 동안 밖에 나오지 않으며
아내에게 밥을 차려주었고,
사람을 먹이듯 돼지에게 먹이를 주었다.
따로 마음 쓰는 일도 없이
그렇게 소박하게 지내며 우두커니 살아갔다.
소란스런 일이 있어도 상관 않고,
죽을 때까지 한결같았다.
열자와 호자, 그리고 계함의 우화는 <장자>의 여러 우화 가운데서도 제법 길이가 긴 편에 속한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우선 정나라에 계함이란 자가 있었단다. 그는 꽤 신묘한 무당이었는데, 사람을 보면 언제 죽을지를 정확히 알아맞혔다나. 그런 까닭에 계함을 보면 도망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관상을 읽히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하긴 제 운명이 궁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제 운명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열자가 그를 보고 홀딱 반하고 말았다. 이에 돌아와 그의 스승 호자에게 말한다. "예전에는 선생님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오늘 더 빼어난 사람을 만났습니다." 대체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아무리 봐도 선생 앞에서 할 소리는 아니다. 천연덕스럽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계함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열자에게 호자가 이렇게 말한다. “내일 한번 데리고 와 보거라.”
이렇게 이루어진 계함과 호자의 만남. 첫 만남을 마치고 계함은 나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열자에게 말한다. “안 되겠어, 자세 선생은 앞으로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았네.” 계함이 돌아가고 열자가 호자에게 달려가 눈물을 펑펑 흘리며 계함의 말을 전한다. 선생님, 사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답니다. 그러나 호자는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다. 일부러 생기가 없는 모습을 보였다나 뭐라나. 다음날 다시 보잔다.
다음날 두 번째 만남을 마치고 계함은 활짝 핀 얼굴로 열자에게 말한다. “다행이네! 자세 선생의 병이 나았어. 나를 만나 이렇게 된 거지.” 계함을 돌려보내고 열자는 함박웃음을 안고 스승 호자를 찾아가 싱글벙글 웃으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선생님의 병이 씻은 듯 나았답니다! 역시나 별로 요동하지 않는 호자. 다음날 다시 보자나?
세 번째 만남. 이번에 계함의 얼굴은 좀 어둡다. 뭔가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다. “자네 선생의 상태가 왔다 갔다 하네 그려. 좀 안정되면 다시 보기로 하세.” 사정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순진한 열자는 다시 그 말을 스승 호자에게 전할 뿐이다. 이때 호자의 말이 흥미롭다. 요약하면 각기 다른 모습을 내보인 것이라고. 비유인즉 멈추어 있는 물도 있고, 흐르는 물도 있으며, 빙글빙글 소용돌이치는 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호라. 호자는 매일 계함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죽을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알쏭달쏭 괴이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대관절 무슨 변신술이 있어 그렇게 매일 전혀 다른 상태를 내보이는 걸까? 더 놀라운 것은 호자가 가지고 있는 아홉 가지 모습 가운데 셋만 보였단다. 자,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테니 다음날 다시 계함을 데리고 오란다.
이튿날, 열자의 요청에 따라 계함은 다시 호자를 찾았다. 그러나 웬걸. 호자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도망가는 게 아닌가. 제대로 마주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달음박질하여 멀리 달아나 버렸다. 이때 호자가 말한다. “잡아라!” 그러나 어찌나 빠른지, 재빨리 쫓아가 보았지만 잡을 수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돌아온 열자에게 호자는 그 비법을 슬쩍 알려준다. 존재가 채 있기도 전의 모습을 보여줬다나 뭐라나.
열자의 스승 호자는 분명 빼어난 인물이 틀림없다. 매번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바꿀 수 있으니 말이다. 대관절 그는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호자를 붙잡고 그 변신술(?!)의 비법을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겠다. 그러나 그보단 계함과의 차이에 주목하자.
계함은 명철한 지혜를 지닌 인물이다. 그는 뭇사람의 삶을 꿰뚫어 보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언제 어떻게 될지를 아는 인물. 그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열자가 그에게 반해 버렸던 것이겠지. 호자는 그와 다르다. 호자는 꿰뚫어 볼 수 없는 기묘함을 지닌 사람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계함이 호자의 상태를 척보고 아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일부일 뿐이다. 호자는 스스로 아홉 가지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했는데, 절반 이상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계함이 도망간 까닭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다음날 또 다른 호자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계함과 호자의 이야기는 우리가 명확히 안다고 생각하는 지식, 콕 집어 무엇이라 지칭할 수 있는 지식에 대한 비유이다. 계함은 인간사를 누구보다 명확히 아는 사람이라고 세상이 이름을 날렸지만, 호자의 진면목을 보고는 얼이 빠져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읽을 수 없는 상대, 도무지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심연을 마주한 순간 계함은 커다란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명한 지식을 숭배하는 자는 무지를,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사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식의 말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한다. 따져보면 그때나 이제나, 과거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지식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일체의 것이 모두 변하고 지나가는 것이라면 그런 식의 지식은 한때의 쓸모만 갖출 뿐이다.
장자는 자명한 진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변화를 피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도리어 어리석음이란 이 변화의 세상에서 오직 하나의 판단과 지식을 확고한 진리인양 생각하는 것이다.
나아가 장자는 이 변화의 근원에는, 모든 천태만상의 기저에는 혼돈이 있다 말한다. 어떤 말로도 이야기할 수 없는 괴이하고 이상한 것. 혼돈이라는 말처럼 이것저것이 뒤죽박죽 섞여 그 무엇도 명료하지 않은 상태. 어떤 말도 더하기 힘든, 그저 얼이 빠져 넋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 무엇.
<응제왕>의 마지막 우화는 혼돈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숙과 홀이 혼돈을 찾아와 놀았단다. 혼돈의 환대에 보답하기 위해 혼돈에게 매일 하나씩 구멍을 뚫어주었다. 보고, 듣고, 숨 쉬고, 말할 수 있는 일곱 개의 구멍을 뚫자 혼돈은 죽어 버렸다. 이 우화는 거꾸로 보고, 듣고, 숨 쉬고, 말할 수 있다면 혼돈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다르게 말하면 혼돈이란 보지도, 듣지도, 말할 수도 없는, 우리의 감각과 영영 먼 컴컴함과 답답함의 세계를 일컫는 표현이다.
<장자>는 이 혼돈의 이야기로 <내편>을 끝내고 있다. 이 우화는 혼돈을 마주한다 해도 계함처럼 도망치지 말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혼돈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단편적인 지식을 붙잡고 혼돈의 세계를, 이 세계의 진면목을 두려워하기만 하는 사람은 <장자>와 거리가 멀다. <장자>는 반대로 그 혼돈 속으로 침잠해 들어갈 것을 주문한다.
그렇다고 그가 이런저런 것을 마구 뒤섞어 좋은 게 좋은 것이지 하는 식으로 이야기한다고 생각하지는 말자. 혼돈으로부터 도망가지 않는다는 것은 도리어 별것 아닌 소박한 일일 수 있다. 열자의 행동이 그렇다. 그는 호자의 가르침을 듣기도, 계함을 선망하기도 했다. 한편 계함과 호자의 만남을 지켜본 인물이기도 하다. 헌데 그의 행보는 별로 대단한 것이 못된다. 집으로 돌아가 밥하고 집안일하는.
이는 특정한 깨달음, 어떤 새로운 발견 뒤에 대단할 것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와장창 깨부수는 결말이다. 열자는 속세를 떠나지도 않았으며, 도를 닦겠다는 식의 방대한 목표를 세우지도 않았다. 다만 집으로 돌아갈 뿐이다. 일상으로 돌아가 제 할 일을 할 뿐이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런저런 세상사에 덜 흔들리게 되었다는 정도.
나는 <장자>라는 책이 엄청난 진리를 전하는 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딘가 은거하며 도를 닦는 이른바 속세를 떠난 삶을 이야기하는 책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삶을 송두리째 바꾸는 대단한 깨달음을 전하는 책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도리어 <장자>는 열자의 이야기를 통해 무언가를 깨우친 이후의 순간에 주목한다. 일상으로 돌아가 소박하게 주어진 삶을 살아야 할 뿐이다.
숙과 홀은 각기 잠깐, 문득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잠깐, 문득 깨우친 것이 있을 것이다. <장자>를 읽으며 무언가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겠지. 그러나 그것이 답이라 생각한다면 위험하다. 혹자는 혼돈에게 뚫어준 일곱 구멍이 <장자: 내편> 총 7편을 가리키는 것이라 해석한다. 그렇게 보면, <장자: 내편> 7편을 읽으며 보고, 듣고, 말한 것들로 혼돈을 몰아낼 수 있을 법하기도 하다. 그러나 혼돈이 사라진 뒤에는 어떻게 될까? 계함처럼 잘난 척하며 아는 체 하는 삶이 되는 건 아닐까?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어떤 글을 읽었다는 것은 확실이 새로운 시선을 선물해주기 마련이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그러나 장자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말했다. 보는 것에만 머물면 도리어 깜깜이가 될 수도 있다고. 혼돈을 직시하는 자는, 특정 지식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이다. 단편적인 지식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는 사람이다.
무엇을 보았든, 무엇을 알았든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아무리 커다란 감동이 있더라도 별반 감동 없는 일상이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이란 대단치 않은 사건들의 연속이다. 밥하고 집안일하고, 삶을 살아내는 시간. 그러나 그 시간이야 말로 가장 중요하고 귀중한 시간 아닌가. 죽을 때까지 일상을 살 테니 말이다. 부디 그때까지 대단치 않은 삶을 그럭저럭 잘 살아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