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장자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기픈옹달 May 22. 2020

오독보다 더 두려운 것

새로운 장자 읽기는 어떻게 가능할까

조상이라는 자가 있었어
송나라의 사신으로 진나라로 갔지
진나라 왕이 그를 좋아했다나봐
수레 몇 대를 선물로 주었데
그가 송나라로 돌아와 옛 친구 장자를 찾았어=

“이렇게 좁고 지저분한 곳에서
별 볼일 없이 산다니
도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네
천하를 호령하는 임금을 만나
번듯한 수레 몇 대를 받아오는 일이
내가 잘하는 일이지”=

“진나라 왕이 몸이 좀 안 좋다며?
종기의 고름을 빨아주는 자에게 수레를 내린다더군
치질을 핥아주는 자에게는 수레 다섯 대를 내린다지
지저분한 데를 핥아줄수록 수레를 더 준다던데
그대는 진나라 왕의 똥꾸녁을 얼마나 핥아주었으면
이렇게 많은 수레를 받았을까!”


미국에서 지내는 모 선생과의 대화. 그는 노자와 장자를 읽으면 마음이 편안하단다. 어째서 일까? 잘 모르겠다. 여튼 마음이 편안해진단다. 짧은 대화가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불편함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째, 나에게 노자와 장자는 편안함을 가져다주는 책이 아니었기 때문에. 둘째, 노자와 장자에 대한 뻔하디 뻔한 독해와 조금도 어긋나지 않았으므로. 셋째, 편안함을 선물해주는 책을 읽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질문 때문에.


내가 철학과로 진학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가 던진 질문, ‘철학관을 차리려고?’ 반쯤은 농담이었겠지만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뒷맛은 여전히 씁쓸하게 남아 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이른바 ‘철학관’이라는 곳의 문턱을 한번도 넘어보지 못했다. 그곳이 대관절 무엇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에 묻어 있는 일종의 무시와 경멸을 읽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연구실, 도서관, 평생교육원, 학교 등등 나름 다양한 공간에서 숱한 사람을 만났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지한 태도로 자리에 앉은 사람을 그리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장자>를 강의한다고 할 때 진지하게 <장자>를 배워보겠다고, <장자>를 좀 꼼꼼히 읽어보겠다고 앉아 있는 사람을 만나기 힘들다. 


하는 이야기를 들어나 보자, 그리 지대한 관심은 없으나 시간 낭비는 아니겠지 하는 식의 접근은 그래도 좀 낫다. 어찌 매 시간 책을 읽어오기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일상의 분주함을 챙기며 살아가기에도 바쁜데. 내가 문제 삼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다.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하여 노력을 기울이는가 하는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다. 도리어 진지하지 못한 열정이 문제다.


성급한 일반화를 하자. 세상의 철학이 둘 있다고 할 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 있다고 할 때  동양철학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진지하지 않다. 배울 의지도 호기심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텍스트를 분석하겠다는 시도, 이를 해석해보겠다는 노력도 보이지 않는다. 텍스트의 구조나 시대적 배경, 역사적 의미, 이론적 접근 등등은 뒷전이다. 어렵고 복잡하지 않기를, 어서 내 삶의 자양분이 되기를 강요한다.


이른바 동양철학이 소비되는 모습을 보면 가끔은 패스트푸드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패스트푸드의 미덕은 일단 빠르게 배를 채워준다는 거다. 맛과 건강보다 일단은 배부르고 볼 것. 동양철학이니 하는 것도 비슷하다. 개념이나 역사적 배경보다는 일단 감동을 주고 볼 것. 당연히 텍스트를 읽고 해석하는 데 긴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 


대학원을 다니며 흥미로웠던 점 가운데 하나는 동철과 서철, 그러니까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이 스승의 날을 따로 챙긴다는 점이었다. 선생도 다르고 배우는 것이 다르니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이 깊은 골의 한쪽에는 은연중 ‘동양철학은 철학이 아니다’라는 정서가 깔려있었다. 철학이라는 보편 학문의 세계에 ‘동양’철학이니 ‘중국’철학이니 하는 수사가 붙는 것이 옳지 않다는 주장. 


이런 식의 접근은 때로 학문의 역량을 헤아리는 척도로 쓰이곤 한다. 예를 들어 칸트 전공자가 주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는 귀를 기울이지만, <논어> 전공자가 소크라테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을 전공한 사람들과 ‘동양철학’을 전공한 사람은 선명히 구분된다. 


돌아와 텍스트가 무엇이 되었든, <논어>를 읽었든 <노자>를 읽었든 <장자>를 읽었든 별 차이가 없는 것은 바로 진지함이 부족한 까닭이다. 호기심 대신 기존에 어슴프레 가지고 있던 인상을 다시 확인하고 싶은 까닭이다. 상식대로 읽고, 상식과 맞춰보는 것으로 해석을 마치고 싶기 때문이다. 


이론과 분석 대신 감동과 성찰을 요구하는 것. 이 진지하지 못한 태도의 근간에는 이른바 멸시와 무시가 담겨 있다. 손쉽게 읽고 싶어하는, 텍스트를 붙잡고 끙끙 앓고 고민하고 싶어하지 않는, 별반 새로울 것이 없다는 지레짐작. 이를 종합하면 오리엔탈리즘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서구의 이성과 동양의 감성, 서구의 분석과 동양의 윤리, 지성과 감동 등등의 구분은 실상 하나의 세계를 둘로 나누어 놓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하나의 언어로 분석하고 다른 세계를 한쪽으로 밀쳐버린 것에 불과하다. 결국 텍스트는 읽히지 않고 해석되지 않은 채 그저 감동만 선사해줄 뿐이다. 그것도 뻔한 감동을.


<장자>는 과연 마음을 편안케 하는 텍스트인가? 삶을 성찰하고 삶의 자유로움을, 행복한 삶의 길을 이야기하는 텍스트인가? 장자의 친구 조상은 장자와 대화를 나누고 어떤 표정이었을까. 커다란 깨달음을 얻은 표정이었을까. 아니면 거꾸로 얼굴을 붉히고 성낸 표정이었을까. 대놓고 화내지는 못하더라도 떫떠름한 표정은 아니었을까. 나는 <장자>를 읽는 누군가의 표정도 이와 비슷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곤 한다. 어찌 평안과 위안만 있을 것인가.


<장자>에는 편향이 있다. 한쪽의 이야기에 귀기울인다. 장자는 공평무사한 잣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는 백정과 노비와 같은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오늘 한끼를 걱정하는 가난한 삶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이리저리 생명이 베이는 현실을 또렷이 응시하였다.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의 욕망을 따라 높다란 사다리에 오르다 굴러 떨어져 내리는 사람들에 주목하였다.


그가 인식한 현실은 척박했고, 그가 살아간 시대는 어지러웠다. 그런데도 <장자>를 읽고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는 그렇게 읽어낸 그의 삶이 그다지 척박하지도, 요동치지도 않았던 까닭일 테다. 감당할만한 고통과, 감당할만한 고민을 가지고 있던 건 아닐까. 감당할 수도, 가늠할 수도 없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면 <장자>를 편안히 읽을 수 있었을까. 아니, 도리어 채 읽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나는 삶에 안정감을 선물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일렁이는 세상 속에서 삶이라도 단단해야지. 그러나 안정감을 선물하는 것이 어째서 꼭 독서여야 하는가. 삶의 안정과 평안을 주는 것은 독서 이외에도 많다. 특정한 예술 작품일 수도 있고, 영화일 수도 있으며, 게임일 수도 있다. 아니 그저 따뜻한 한끼 식사가 일상의 스트레스를 잠시 막는다. 그렇게 얻은 간단한 여유를 행복이라 할 수도 있다. 


오독보다 더 두려운 것은 정해진 구도에 맞추어 읽는 것이다. 기존 장자의 이미지와 별반 다를 바 없이 읽어내는 것이다. 뻔하고 습관적인 해석. 문제는 이런 뻔하고 습관적인 해석에 적잖은 사람들이 열정을 쏟는다는 거다. 진지함 없는 열정. 


습관적 독해는 늘 해롭다. 따져보면 읽기 자체가 아무런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상 필요했던 것은 <장자>라는 낡은 글이 아니라, 다양한 고민이 담긴 장자의 말이 아니라 좀 보기 좋은 <장자>라는 책이 아니었을까. 잘 읽지 않아도 옆에 끼고 있으면 스스로가 돋보이는 책. 


오독은 기존의 해석과 다르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하나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새로운 길을 틔워 불 수도 있고, 새로운 과제를 던져줄 수도 있다. 때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낯선 길을 발견하겠지. 문제는 오독조차 허락하지 않는. 기존의 언어를 반복적으로 답습하는 태도이다.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이 그저 뻔한 질문으로 텍스트를 마주 하는 것. 미쳐 책을 읽기도 전에 기대했던 평안함을 <노자>니 <장자>니 하는 것 따위와 함께 마구 늘어놓는 것이 문제다. 


사실 새롭게 읽기는 꽤 어려운 과업이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나니’ 홀로 자신만의 해석의 길을, 독특한 자기 관점을 갖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뻔한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그나마 쉽다. 교과서적 해석, 사람들이 환호하고 반기는 해석, 조금의 불편함도 낯섦도 없는 해석. 그런 독해는 손톱만큼도 이롭지 않으며 도리어 해로울 뿐이다. 


그러니 뻔하디 뻔한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보자. 목에 걸리는 글을 목에 걸리는 대로 내버려 두자. 체한 것처럼 뱃속에 남아 나를 괴롭히는 문장들을 내버려두자. 의미없이 지나가는 말들도, 밋밋하고 무미건조한 말들은 그냥 지나치자. 한두 구절이라도 좋다. 나를 사로잡는 단어, 표현, 문장은 한 둘이라도 좋다. 뼛속을 울리고, 가슴을 뛰게 만들고, 먹먹하니 나를 흔드는 씨앗들을 벗으로 삼아야지. 그제야 좀 다른 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리고 그 뒤에는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