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2-4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선생님께서는 세속을 떠나시려는군요. 제발 저를 위해 글을 지어주십시오.” 이에 노자가 상하편의 글을 지었다. 도덕道德의 의미를 밝히는 오천 여자의 글을 쓰고는 떠났는데 그 뒤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子將隱矣,彊為我著書。」於是老子乃著書上下篇,言道德之意五千餘言而去,莫知其所終。
함곡관은 좁은 협곡에 위치한 관문으로 진나라로 들어가는 입구인 동시에, 진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출하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통로였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어느 날 동쪽에서 자색 구름이 일더니, 흰 수염을 길게 늘인 노인이 커다란 소를 타고 나타났다. 관문을 넘어 서쪽으로 가려했단다. 이때 관문을 지키던 관윤이라는 자는, 노인의 비범함을 보고 한 편의 글을 부탁했다. 일필휘지로 남긴 짧은 글이 지금까지 전해지는데, 그것이 바로 5,000여자의 <노자 도덕경>이라 한다. 중국 링바오(灵宝)시 함곡관 풍경구에 가면 커다란 노자 황금상과 함께 커다란 벽 양쪽으로 적은 <노자 도덕경> 전문을 만날 수 있다.
<노자>는 상하편으로 이루어졌는데 각각 <도경道經>과 <덕경德經>이라 불리었다. 각각 ‘도’와 ‘덕’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도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사마천은 이 책의 저자 노담老聃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남기고 있다. 노자에 대한 거의 유일한 역사기록인데 내용이 모호하여 대관절 노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대충 내용을 요약해보자.
노자의 본래 이름은 이이李耳로 주나라의 옛 문헌을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공자가 그의 소문을 듣고 주나라에 찾아가 ‘예禮’에 대해 물었는데 노자는 옛사람의 살과 뼈가 삭아 사라지듯, 예도 마찬가지이니 쓸모없는데 공을 들이지 말라고 훈계했다 한다. 이를 보면 공자와 노자의 예론禮論 따위를 이야기해볼 수 있을 법하나, 이보다는 공자가 돌아와 제자들에게 했다는 말이 더 유명하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며, 짐승은 달음박질 하지. 새는 활로, 물고기는 낚시로, 짐승은 그물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 오늘 내가 그런 인물을 만났다.”
용과 같은 신묘한 인물. 그래서일까? 대관절 ‘이이’라는 이름의 사람이 어떻게 ‘노자’로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사마천은 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노자가 태어났을 때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라나. 사마천은 노자에 대한 소문을 함께 전한다. 160 혹은 200여 살을 넘게 살았다는 말이 있다. 또한 노자로 불린 다른 인물도 있다. 공자와 동시대 인물인 노래자老萊子라는 초나라 사람, 공자보다 130여 년 뒤의 인물인 주나라 태사太史 담儋 까지. 사마천은 최소한 각기 다른 세명의 노자를 소개한다. 대관절 어떻게 된 것일까?
결론을 이야기하면 노자라는 역사적 인물을 고찰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체 언제적 사람인지. 그가 어떤 일을 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설사 노자라는 역사적 인물이 있다 한들, 그가 오늘날 전해지는 <노자>라는 책의 저자인지도 불분명하다. 제목을 가리면 이것이 누가 쓴 글인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는 모르나 ‘도’와 ‘덕’에 대한 격언집에 ‘노자’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할 수도 있다.
노자에 대한 신화적 이야기가 <노자> 해석에 신비로움을 더했을까? 아니면 <노자>의 모호한 내용이 노자에 얽힌 신화를 만들어 내었을까? 흔히 노자가 함곡관을 넘어 서쪽으로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빌어 <노자>를 은자隱者의 철학으로 이해하곤 한다. 전란이 벌어지는 세상을 등지고 자연으로 귀의했다는 식으로. 그러나 정반대의 해석도 가능하다. 문제는 왜 하필 서쪽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동서남북 가운데 서쪽을 고른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노자가 서쪽의 진나라를 향해 갔다고 본다. 서쪽으로 가 천하통일을 예비했다는 식으로. 이렇게 보면 노자의 길은 은둔자의 행보가 아니라 예언자의 행보가 된다.
<노자> 본문에 대한 해석도 정반대로 갈리곤 한다. 누구는 <노자>가 자유와 일탈을 이야기한 책이라 본다. 누구는 병법가의 지혜를 담은 책으로 통치술을 이야기하는 책이라 주장한다. 이러한 논란은 노자가 언제적 사람인지, <노자>가 어느 시대에 완성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어진다. 과연 노자는 공자보다 앞선 인물인가 아니면 후대의 인물인가. <노자>는 춘추시대의 저작인가 아니면 전국시대의 저작인가. 사마천의 <사기> 기록을 근거로 이 논쟁을 매듭짓지는 말자.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마천의 기록 자체가 모호할뿐더러, 엉성한 구석이 많다. 사마천 당대에 떠돌아다니던 노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데 묶어 기록한 것에 불과하다.
질문을 바꾸자. <노자>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이야기하기 이전에 <노자>의 누구를 독자로 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자. 고대 중국의 철학자들은 인류 모두를 위해 글을 남기지 않았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저마다 상대하는 청자, 혹은 독자가 서로 달랐다. 예를 들어 공자의 주요 말 상대는 그의 제자들이다. 맹자는 주로 제후들을 상대로 하였다. 그렇다면 장자는? <장자>에 언급되는 사람들의 사회적 배경으로 보건대 그는 변두리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이를 참고하면 앞서 언급한 순자와 한비자의 관점도 분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시선의 높이에 따라 똑같은 사건도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노자>의 이런 부분을 보자. "왕은 곧 하늘이며 하늘은 곧 도리(道)이며, 도리를 따르면 오래가고 죽을 때까지 화를 입지 않는다. (王乃天,天乃道,道乃久,沒身不殆。)" "그러므로 도는 크고, 하늘이 크고, 땅이 크며, 왕 또한 크다. (故道大,天大,地大,王亦大。)" <장자>에서 ‘도’는 헤아릴 수 없는 크기와 깊이를 지닌다. 장자는 언어가 끊어진 그 지점에서 도를 감각할 수 있으리라 말한다. 장자에게 도는 일상의 단면성을 극복하기 위한 지렛대, 현실의 한계를 파괴하는 무기였다. 그러나 <노자>의 도는 천지에 묶여 있다. 그가 말하는 도는 천지만큼 크고 광활하다. 그러나 이 영역은 왕이 통치하는 영역과 일치한다. 천지가 크듯 왕도 크고, 그가 다스리는 천하도 크다.
<노자>에서 말하는 천지란 천자가 통치하는 천하와 같다. <노자>는 천하의 통치자를 자신의 청자로 상정하고 있다. 적어도 천하의 잠재적 통치자가 노자의 주된 관심 대상이다. 그래서 혹자는 <노자>가 호모 임페리얼리스, 즉 천하 패권을 다투는 인물을 대상으로 쓰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노자>는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텍스트가 된다.
새롭게 천하를 통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낯선 욕망이 서로 엇갈리며 다양한 인간군상이 가득 모여 있는 그 복잡하고 광활한 세계를 다스리려면? 과거 주나라의 방식은 이를 분할하여 나누어 다스리는 식이었다. 천하는 여러 제후국이 모인 하나의 커다란 가족이었다. 주나라는 천하의 종주국宗主國으로 가장家長 역할을 했다. 제후들은 또 저마다 나라 안에서 가장 역할을 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국가는 작은 가족으로 쪼개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옛날 방식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새롭게 등장할 권력이 천하 백성의 아비와도 같은 인물이 아니라면? 국가 안의 국가, 가족 안이 또 작은 가족으로 잘개 쪼개진 권력이 아니라 천하에 오직 한 사람이 절대적이고 독립된 권력을 소유한다면? <노자>가 이야기하는 방식은 이렇다. "거둬들이고 싶다면 늘려줘야 한다. 약하게 하고 싶다면 강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망하도록 하고 싶다면 성공하게끔 해야 한다. 빼앗고 싶다면 줘야 한다. 이를 일러 감춰진 지혜라 한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기는 법이다. (將欲歙之,必固張之;將欲弱之,必固強之;將欲廢之,必固興之;將欲奪之,必固與之。是謂微明。柔弱勝剛強。)"
부드럽고 약한 것이 단단하고 강한 것을 이긴다. 이 역설을 오해하지는 말자.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말은 현실적인 힘의 불균형을 뒤집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그 반대로 해석할 수 있다. 부드러움과 약함이란 힘의 불균형을 지속하는 기술이다. 조심스러운 사람만이 이 절대적인 권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커다란 나라는 마치 푹 익은 생선과도 같이 다루어야 한다. (治大國若烹小鮮。)" 바스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많이 가질수록 부드럽고 약해야 한다. 그래야 오래갈 수 있는 법이다.
노자의 역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과는 다른 통치 체제가 등장한 까닭이다. 천하는 넓고 사람은 많다. 이 넓고 많은 세계를 통치하는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덕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일에서 출발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 이 낡은 주장은 천하가 확대된 가족이라 본다. 그러나 새로운 주장은 다르다. 가족으로 묶을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들의 집합체를 다스리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다. 새로운 권력이 갖추어야 할 새로운 기술. 노자의 역설은 여기서 출발한다.
종종 <노자>는 장생長生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이해되었는데, 이는 현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노자>의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하늘이 영원하고 땅이 영원하듯. 천지가 그렇게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야 오래 살 수 있다. (天長地久。天地所以能長且久者,以其不自生,故能長生。)" 오래도록 가야 한다. 마치 천지가 그러하듯. 그러나 대부분 고대 중국 철학자들은 영원한 것은 없다고 보았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기 마련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장자>에는 도리어 죽음을 찬미하는 것 같은 내용이 있기도 하다. “몸뚱이를 받아 태어났으니, 순순히 죽음을 기다리자. 세상 사람들과 서로 생채기를 내며 살아가면서도 시간이 흐르는 것이 마치 재빠른 말과 같아 멈출 수가 없으니 애닲지 않은가! 죽을 때까지 힘써 일해도 이루어 놓은 게 없고, 고되고 피곤하더라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슬프지 않은가! 죽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다 그게 뭐 좋겠는가? 몸뚱이와 더불어 마음이 함께 늙어갈 텐데 그게 더 큰 슬픔 아닌가? 사람의 삶이란 이처럼 허망한 것일까? 어찌 나만 허망하겠는가. 허망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一受其成形,不亡以待盡。與物相刃相靡,其行盡如馳,而莫之能止,不亦悲乎!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可不哀邪!人謂之不死,奚益?其形化,其心與之然,可不謂大哀乎?人之生也,固若是芒乎!其我獨芒,而人亦有不芒者乎!)”
장자는 영원을 추구하지 않는다. 삶이란 예측하지 못한 사건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직면하는 사건들은 대체로 고달프고 힘든 일뿐이다. 그래서 삶이란 낡아가는 과정이다. 이런저런 사건에 이리저리 치이면서, 긁히고 베이는 인생의 상처를 주름으로 새기며 늙어가는 게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사 죽지 않는다 해도 반갑지 않다. 몸뚱이처럼 마음도 그와 더불어 낡아버릴 테니 말이다. 그러니 죽음은 슬퍼할 것이 못된다.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나아가 기뻐할 일이기도 하다. 삶의 고역에서 벗어났으니 말이다. 장자는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한다.
그러나 <노자>는 죽음을 말하지 않는다. 죽음이란 자연스러운 변화도 아니고, 즐겁게 맞이해야 할 기쁜 사건도 아니다. 죽음은 피해야만 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노자>는 장생長生에 방점을 찍고 있다. 천지만큼 오래가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스로를 천지에 견주는 인간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그는 천지 속에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라, 천지와 더불어 살아가는 인물이다. 천지와 더불어 영원하기를, 영원히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기를 꿈꾼다. <노자>는 영원을 꿈꾼 자, 만겁의 역사를, 만세萬歲를 목표로 삼은 인간의 출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