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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03. 2020

겨우 형벌을 면할 뿐

1강 장자와 공자 #3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의외로 <장자>에는 공자가 많이 등장한다. 이를 바탕으로 역사적 공자의 모습을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아예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담은 것은 또 아니다. 일부는 공자가 실제로 경험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논어>와 <장자>가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초나라의 광사 접여가 공자 곁을 지나가며 이렇게 노래하였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찌하여 이 꼴이 되었는가? 과거는 탓할 수 없지만, 앞일은 그래도 도모할 수 있지 않은가? 그만두라! 그만두라! 지금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은 위태로울 따름이다!”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그와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일부러 빠른 걸음으로 피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 박성규 역, 소나무. 713쪽 <미자 5>


<논어> 후반부를 보면 일민逸民들이 등장한다. 일민이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몸을 숨긴 사람들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초광접여楚狂接輿'도 마찬가지 인물이다. 접여接輿란 그의 이름인데, 그 앞에 '초나라 미치광이(楚狂)'이라는 말이 붙었다. 여기서 미치광이(狂)란 정신이 어떻게 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세속과는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통상적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 그들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고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른 식의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그를 만나고자 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장자>에도 보인다. 차이를 주목해보자. 


공자가 초楚나라에 갔을 때, 초나라의 광접여狂接輿는 그(가 머문) 집 문앞을 오가며 노래했다.

“봉새여, 봉새여, 어째서 네 덕이 약해졌느냐. 앞날은 기대할 수 없고 지난날은 좇을 수가 없다. 천하에 (올바른) 도가 있으면 성인은 (그것을) 이룩하지만, 천하에 (올바른) 도가 없으면 성인은 (몸을 숨기고) 살아갈 뿐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형벌을 면하는 게 고작일 뿐. 행복은 깃털보다 가벼워도 (손에) 담을 줄 모르고, 재앙은 땅보다 무거워도 피할 줄을 모른다. 그만두게, 그만둬. 도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짓은. 위험하네, 위험해. 땅에 금 긋고 (그속에서) 허둥대는 따위 짓은. 가시(나무)여, 가시여. 내 가는 길 막지 말라. 내 가는 길은 구불구불 (위험을 피해 가니), 발에 상처를 내지 말라. 산의 나무는 (사람에게 쓸모 있어) 스스로 자기를 베게 만들고, 등불은 스스로 제 몸을 태운다. 계수나무는 (계피를) 먹을 수 있어서 베어지고, 옻나무는 (옻칠에) 쓸모 있어 쪼개진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는 것의 쓸모는 알아도 쓸모 없는 것의 쓸모를 모른다네.”

– 안동림 역, 현암사. 143쪽 <인간세>


비슷하지만 많이 다르다. <논어>의 접여는 ‘往者不可諫,來者猶可追。’라며 지나간 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고 미래를 기약하자고 말한다. 그러나 <장자>의 접여는 염세적이다. ‘來世不可待,往世不可追也。’ <논어>의 접여가 미래를 기대하자고 했던 반면 <장자>의 접여는 미래조차 기대할 것이 없다 말한다. 대체 무엇 때문일까? 


<논어>에서 ‘今之從政者殆而’라고 단순히 정치적 삶을 비판했다면, <장자>의 비판은 더 날카롭다. ‘天下有道,聖人成焉;天下無道,聖人生焉。方今之時,僅免刑焉。’ <장자>의 접여가 말하는 시대의 모습은 이렇다. '천하무도天下無道!', 극심한 혼란기를 살고 있다. 겨우 형벌을 면할 뿐. 


치세와 난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공자가 말하였다. “독실한 믿음으로 학문을 사랑하고, 죽음으로 지켜 도를 찬미하라. 위태로운 나라에 들어가지 말고, 혼란한 나라에 살지 말라. 천하에 도가 있으면 나아가고, 도가 없으면 은둔한다. 나라에 도가 있는데 가난하고 천하면 수치요, 나라에 도가 없는데 부유하고 귀하면 수치이다.”

– 박성규 역, 소나무. 325쪽. <태백 13>


공자도 어지러운 세상을 피해 살라고 말했다. 따라서 은둔하는 삶이 공자의 지향과 비치되는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도리어 문제는 시대의 모습이 달라졌다는 데 있다. 공자와 장자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춘추전국이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를 함께 묶어 부르는 말이다. 이 둘은 각각 <춘추>와 <전국책>이라는 책 제목에서 따온 이름이라 정확한 시기 구분이 어렵다. 어디까지를 춘추시대, 어디부터를 전국시대라고 부르는지는 학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대략적으로 진晉이 조趙, 위魏, 한韓 세 집안에 의해 망하고 이 세 집안이 제후국으로 등장하는 시기쯤으로 본다.


춘추시대까지는 주周 왕실을 중심으로 한 봉건제가 어느 정도 작동했다면, 전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체제 자체가 뒤흔들려 버렸다. 당연히 혼란도 그만큼 가중될 수밖에. 장자는 이를 '겨우 형벌을 면할 뿐(僅免刑焉)'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이제는 가시나무 길을 걷듯 조심조심 살아가야 한다. 이제까지 통용되었던 가치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 현재 내 삶을 챙기기도 버거운 것이 장자가 마주한 현실이었다. 


잔인한 시대의 엄혹한 현실은 기존의 가치를 되묻게 만든다. 이전까지 전해져 온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를 따져 묻게 된다.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은 낡은 것이 되고, 나아가 어리석은 태도에 불과하다. 예전의 방식을 따르다가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도 있다.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어느 날) 당상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輪扁이 당하堂下에서 수레바퀴를 깍(아 만들)고 있다가, 총치와 끌을 놓고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다.

“(한마디) 묻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으시는 건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이지.”

“성인이 (지금) 살아 계십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벌써 돌아가셨다네.”

“그럼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이군요.”

환공이 (벌컥 화가 나서)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바퀴 만드는 목수 따위가 어찌 시비를 건단 말이냐. (이치에 닿는) 설명을 하면 괜찮되 그렇지 못하면 죽이겠다.”

윤편이 대답했다.

“저는 제 일(의 경험으)로 보건대, 수레를 만들 때 너무 깎으면 (깎은 구명에 바퀴살을 꽂기에)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다는 일은 손 짐작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 수긍할 뿐이지 입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비결이 있는 겁니다만 제가 제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제게서 이어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70인 이 나이에도 늘그막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겁니다. 옛사람도 그 전해 줄 수 없는 것과 함께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 안동림 역, 현암사. 355~365쪽 <천도>


장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知者不言 言者不知 – 아는 자는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앎(知)이란 각자가 체득하는 깨달음과 같다. 특정한 경험 위에서 각자가 찾아내는 것이다.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참된 깨달음이 아니다. 표현할 수 없는 것, 통상적인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이야 말로 진짜라 할 수 있다. 


역사적인 문화영웅, 성인聖人이 장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 무슨 말을 들을 게 있단 말인가. 그들의 지혜는 그들의 죽음과 함께 죽어 버렸다. 펄떡이는 지금의 삶이야 말로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앎은 과거가 아닌 현재로부터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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