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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03. 2020

역사와 신화

1강 장자와 공자 #2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공자와 장자는 역사적 인물이다. 이 말은 춘추전국이라는 역사적 공간을 무대로 실제로 살았던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에 신화적 내용이 다분히 가미되어 과연 어떤 것이 역사적 실체인지를 헷갈리게 만들곤 한다. 이들에게서 역사와 신화를 구분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에 역사적 기록이 많이 없기 때문이고, 그에 비해 너무나 많은 신화적 상상력이 덧붙여졌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는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에서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러나 그나마 공자는 낫다. 그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 그의 행적이 어떤지에 대해 그나마 많은 자료가 누적된 까닭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 기원전 4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은 오늘날 산둥성山東省 취푸시曲阜市이다. 사마천은 그의 출생에 대해 늙은 아버지와 젊은 어머니가 야합野合해서 낳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많은 말이 있지만 출신 배경이 좋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현존하는 공자의 행적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그의 말년, 약 50대 이후부터이다. 그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없다. 50대에 이르러 고향 노나라에서 관직을 맡았던 것으로 보이나,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직에서 쫓겨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다. 그렇게 방랑하기를 약 14년, 70이 다 된 노인으로 고향에 돌아와 몇 년 뒤 세상을 떠난다. 말년에 <시詩>, <서書>를 정리하고, <춘추春秋>를 썼으며, <역易>에 풀이를 달았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말과 행적을 책으로 남겼는데 그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논어論語>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논어>야 말로 공자의 행적을 잘 알 수 있는, 역사적 공자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이외에도 사마천의 <사기>에 <공자세가孔子世家> 및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이 있지만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공자가어孔子家語>라는 책도 있지만 위작 논쟁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편 장자의 경우엔 역사적 기록이라고 할만한 것이 거의 없다. 가장 많이 인용되는 것이 <사기>의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이다. 제목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편의 주인공은 노자와 한비자이다. 여기에 장자의 이야기가 짧게 끼어있는 꼴이다. 내용도 매우 짧다. 전문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장자莊子는 몽蒙 지방 사람으로 이름은 주周이다. 그는 일찍이 몽 지방의 칠원漆園이라는 곳에서 벼슬아치 노릇을 했고 양혜왕, 제선왕과 같은 시대 사람이다. 그는 학문이 넓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그 학문의 요체는 노자의 말에서 시작하여 노자의 학설로 돌아간다. 십여 만 자에 이르는 그의 책은 대부분 우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어부>, <도척>, <거협> 편을 지어서 공자의 무리를 비판하고 노자의 가르침을 밝혔다. 외루허, 항상자 같은 이야기는 모두 사실이 아니라 꾸며 낸 이야기이다.

장자는 빼어난 문장으로 세상일과 인간의 마음을 살피고 이에 어울리는 비유를 들어 유가와 묵가를 공격했다. 당대의 학문이 무르익은 위대한 학자들도 장주의 공격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의 말은 거센 물결처럼 거침이 없으므로 왕공王公이나 대인大人들에게 등용되지 못하였다.

초나라 위왕은 장주가 현명하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 많은 예물을 주고 재상으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장주는 웃으며 초나라 왕의 사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천 금은 막대한 이익이고 재상이라는 벼슬은 높은 지위지요. 그대는 교제(郊祭, 고대 제왕이 해마다 동짓날 도성의 남쪽 교외에서 하늘에 올린 제사)를 지낼 때 희생물로 바쳐지는 소를 보지 못했소?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다가 화려한 비단 옷을 입고 결국 종묘로 끌려 들어가게 되오. 이때 그 소가 몸집이 작은 돼지가 되겠다고 한들 그렇게 될 수 있겠소? 그대는 더 이상 나를 욕되게 하지 말고 빨리 돌아가시오. 나는 차라리 더러운 시궁창에서 노닐며 즐길지언정 나라를 가진 제후들에게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벼슬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즐겁게 살고 싶소.”

– <사기열전>, 김원중 역, 민음사 83~84쪽.


이것이 장자에 관해 남아 있는 역사적 기록의 전부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정보라고는 그의 고향과 그의 본명 정도이다. 그의 이름은 장주莊周, 그가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어떤 행적을 펼쳤는지 알 수 없다. 구체적인 생몰연대를 추적할만한 내용이 없다. 다만 양혜왕, 제선왕과 동시대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그의 활동 시기를 공자보다 약 150년 뒤로 추정하곤 한다. 양혜왕, 제선왕 시대에 활동한 맹자와 동시대 인물로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 ‘그의 책’이라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장자>와는 다르다. 일단 분량이 훨씬 많다. 사마천은 십여 만 자라고 말하나 오늘날 남아 있는 <장자>는 그의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 <외루허>, <항상자>와 같은 편은 오늘날 <장자>에는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사마천 시대의 <장자> 일부가 남아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장자>가 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장자>에는 장자의 행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몇 가지 짧은 이야기가 들어있을 뿐이다. 유명한 호접지몽과 같은 우화를 빼 버리면, 역사적 인물로서 장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기록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 내용을 종합하면 이렇다. 그는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고, 아내가 있었으나 먼저 세상을 떠났다. 혜시라는 친구가 있었지만 그 역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제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데 장자는 이들에게 자신의 장례를 소박하게 치르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당시의 제왕들 가운데는 장자를 초빙하려 한 사람도 있었고, 장자도 실제로 군주를 만나 보기도 했다. 그러나 장자는 정치에 뛰어들기는커녕 도리어 한적하고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


사마천은 자신을 찾아온 초위왕의 신하에게 던진 장자의 말을 기록하고 있다. 천금과 재상의 자리를 가지고 장자를 초빙하려 하지만 장자는 단칼에 거절한다. 제사에 바쳐지는 소처럼 될 수는 없다면서. 사마천의 기록 이외에도 <장자 외편: 추수秋水>에도 비슷한 기록이 남아 있다.


“내가 듣기에 초楚나라에는 신구神龜가 있는데 죽은 지 3천 년이나 되었다더군요. 왕께선 그것을 헝겊에 싸서 상자에 넣고 묘당廟堂 위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지만, 이 거북은 차라리 죽어서 뼈를 남긴 채 소중하게 받들어지기를 바랐을까요, 아니면 오히려 살아서 진흙 속을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까요?” 두 대부는 대답했다. “그야 오히려 살아서 진흙 속을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 테죠.”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어서) 돌아가시오. 나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닐 테니까!”

– 안동림 역, 현암사. 441쪽. <추수>


‘진흙탕 속에서 꼬리를 끌며 자유롭게 살아야지(吾將曳尾於塗中)’ 그를 데리러 온 대부들은 빈 손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공자에게도 비슷한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공자의 입장은 좀 다르다. 한편 이 사태 자체에 버럭 화를 내는 제자도 있었다. 공자를 부른 사람은 한 나라의 군주도 아닐뿐더러,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었던 까닭이다. 


공산불요가 비읍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초빙하자, 공자가 가려고 하였다. 자로가 화난 얼굴로 말하였다. “가실 곳이 없으면 그만두시지, 하필 공산씨 같은 자에게 가신단 말씀입니까?” “나를 부른 사람이라면 어찌 공연히 그랬겠느냐? 나를 써 주는 사람만 있다면, 나는 동쪽에 주나라의 도를 부흥시킬 것이다.”

– 박성규 역, 소나무. 679쪽. <양화 5>
필힐이 초빙하자, 공자가 가려고 하였다. 자로가 말하였다. “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몸소 앞장서서 악을 행한 자에게 군자는 들어가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필힐이 중모에서 반란을 일으켰거늘, 선생님께서 가려고 하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물론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갈아도 닳지 않음이 견고함 아니겠는가?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음이 흼 아니겠는가? 내 어찌 그저 매달려만 있고 아무도 따먹지 않는 박과 같을 수 있겠는가?”
 
–박성규 역, 소나무. 683쪽. <양화 7>


공자는 가고 싶었다. 천금을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재상의 자리를 보장해 준 것도 아닌데도 그는 가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가까운 제자마저 대놓고 반대할 일을. 그것은 그만큼 공자의 상황이 절박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자는 어떻게든 등용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장자는 그런 태도야 말로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종묘 안으로 스스로 성큼성큼 발을 옮기는 소 마냥 어리석다며 손가락질을 했을 것이다. 장자는 접여라는 인물의 말을 빌어 공자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미치광이 접여의 노래를 들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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