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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03. 2020

학습學習이 아닌 대지大知의 세계로

1강 장자와 공자 #4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잘 알려져 있듯 학습學習이라는 단어는 <논어> 첫 문장에서 나왔다.


子曰:「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공자가 말하였다. “배우고 늘 익히면 기쁘지 않은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않은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

– 박성규 역, 소나무. 25쪽 <학이 1>


과연 여기서 말하는 학습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여러 말이 많다. 과연 공자는 제자들에게 무엇을 배우라고 한 것일까? 그저 배움의 보편적 특성을 이야기한 걸까?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풀이로는 바로 예禮를 배우는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여기서 ‘예’란 단순히 예식, 예절 따위를 일컫는 말이 아니다. 문화, 문명의 총체로서의 예禮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때의 ‘예’란 역사 속에서 축적된 전통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에 공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공자가 말했다. “옛것을 탐구하여 새것을 알아야 스승이 될 수 있다.”

– 박상규 역, 소나무. 79쪽 <위정 11> 


공자가 말했다. “계술하였지 창작하지 않았다. 신념을 가지고 옛것을 좋아하였다. 우리 노팽에 견주어 본다.”

– 박성규 역, 소나무. 261쪽 <술이 1> –


유가는 전통을 숭상하고 역사를 중시했다. 학습이란 옛 성인의 말과 행적을 따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과거 사람들을 따라 그들의 완전한 삶을 똑같이 체득하는 것이 유가의 목표였다. 그러나 장자의 생각은 다르다. 장자에게 과거란 배워야 할 표본이 아니다. '술이부작述而不作', 공자는 전통의 계승자를 자처했다. 장자는 여기에 의문을 던진다. 현재에 통용되지 않는 낡은 구닥다리를 붙잡아 무엇할 것인가? 따라서 학습, 배움 대신 앎, 깨우침을 추구한다. 


이런 점에서 <장자>가 붕새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점은 흥미롭다. 곤이라는 커다란 물고기가 새로 변하는 이야기. 이것은 하나의 우화로서 상식적으로는 이해 불가능한 터무니없는 헛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장자>의 이야기를 잘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괴이하다.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는 몇천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이 물고기가) 변해서 새가 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한다. 붕의 등 넓이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힘차게 날아 오르면 그 날개는 하늘 가득히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이 움직여 대풍이 일 때 (그것을 타고) 남쪽 바다로 날아가려 한다. 남쪽 바다란 곧 천지天池를 말한다.
– 안동림 역, 현암사. 27쪽 <소요유>


곤이나 붕이나 모두 평범하게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不知其幾千里也 -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아니, 그 크기 이전에 북명北冥이나 남명南冥이라는 공간 자체가 추상적이다. 보통 바다로 번역되는 '명冥' 어두컴컴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대체 이 곤이니 붕이니 하는 것들이 어디서 튀어나오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한편 물고기가 변하여서 새가 된다는 말은 어떤가. 모두 알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장자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이 알 수 없는 존재를 비웃는 목소리를 담았다. 바로 매미와 비둘기. 헛소리를 비웃는 목소리는 당연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작은 관점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세계가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小知不及大知,小年不及大年。奚以知其然也?朝菌不知晦朔,蟪蛄不知春秋,此小年也。楚之南有冥靈者,以五百歲為春,五百歲為秋;上古有大椿者,以八千歲為春,八千歲為秋。而彭祖乃今以久特聞,眾人匹之,不亦悲乎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 어떻게 그렇다는 것을 아는가. 조균朝菌은 밤과 새벽을 모르고 씽씽매미는 봄과 가을을 모른다. 이것이 짧은 수명이다. 초나라 남쪽에 명령冥靈이라는 나무가 있다. 5백년 동안은 (잎 피고 자라는) 봄이고 또 5백 년 동안은 (잎 지는) 가을이다. 아득한 옛날 대춘大椿이란 나무가 있었다. 8천 년 동안은 봄이고 다시 8천 년 동안은 가을이었다. 그런데 지금 (불과 7백 년 산) 팽조는 장수한 사람으로 아주 유명하여 세상 사람들이 이에 견주려 한다. 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 안동림 역, 현암사. 31쪽 <소요유>

 

장자가 우화라는 형식을 이용한 것에 주목하자. 그는 말할 수 없는 존재들을 끌어다가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것은 그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가 언어의 경계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말, 언어가 가지고 있는 현실적 한계에 주목한다. 참된 것은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한계를 인식할 때만 우리는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를 맞이할 수 있다. 장자는 이것을 대지大知, 커다란 앎으로 풀이했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진지眞知, 참된 앎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가 말을 불신했기에 또 다른 세계로 눈을 돌릴 수 있었다면, 공자는 말에 대한 믿음과 신뢰에서 출발한다. 말, 언어란 역사를 꿰뚫고 전승되는 거대한 전통 아닌가. 공자는 역사와 문명에 대한 믿음 위에서 스스로를 계승자로 자처했다. 공자에게는 역사와 전통이야 말로 하나의 살아 있는 진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자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유한한 존재 각각은 또 다른 앎을 추구함으로써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라!' 장자는 하나의 역설을 통해 유한한 존재가 다른 존재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한다. 


당연히 이 둘의 차이는 삶의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공자는 수많은 제자를 거느렸다. 약 3천 명의 제자가 그를 거쳐갔다고 한다. 가르침과 배움, 스승과 제자의 고리를 통해 공자의 영향력은 지금도 면면이 이어진다. 그러나 장자에게는 이런 연속성이 없다. 그는 강학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장자에게도 제자가 있었다고 하나, 이 둘의 관계에 대해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장자가 제자를 가르쳤다는 말은 어디서도 들어볼 수 없다. 제자라 부를만한 사람이 있었다고 한들, 공자와 제자들이 모였던 것과는 다른 식의 만남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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