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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10. 2020

똑같이 쓸모없다지만

2강 장자와 맹자 #3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위나라는 공간, 양혜왕이라는 시대. 장자와 맹자가 서로 마주치는 일은 없었을까? 흥미롭게도 <장자>에서도 <맹자>에서도 서로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훗날 두 사람이 끼친 영향력을 생각하면 서로에 대한 언급 정도는 있어야 할 텐데 한마디도 없으니 대체 어찌 된 일일까? 이른 서로의 '노는 물'이 달랐기 때문이며, 나아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정반대였기 때문일 테다. 


이 둘의 차이를 살펴보기 위해 다시 <장자>로 고개를 돌리자. 장자는 손 트지 않게 하는 비법을 얻은 나그네가 장수가 되어 오나라와 월나라의 싸움에서 활약했다고 말한다. 훗날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오나라와 월나라는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다. 오나라와 월나라 하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한쪽에서는 영 보잘것없어 보이던 재주가 이 둘의 치열한 공방에서 크게 활약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전국시대의 전란 속에 장자의 허무맹랑한 소리에도 비슷한 활약을 기대할 수 있을까? 결론만 이야기하면 우화는 우화일 뿐. 장자는 자신의 우화가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던 인물이다. 그는 도리어 그런 치열한 다툼과는 거리가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다른 쓸모의 가능성보다는 쓸모없음 자체에 더 무게를 두는 인물이었다.


혜시와 장자의 또 다른 우화를 살펴보자.


혜시가 장자에게 말했다. "나에게 커다란 나무가 한 그루 있다오. 헌데 줄기가 울퉁불퉁해서 먹줄을 칠 수가 없고 가지는 이리저리 꼬여버려 자를 댈 수도 없소. 그래서 길가에 서 있더라도 목수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오. 지금 그대의 말도 이처럼 크고 쓸모가 없으니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고 무시하는 거요."

장자가 말했다. "선생께서는 살쾡이라는 동물을 아시는지요. 몸을 낮추어 몰래 닭이나 쥐 같은 사냥감에 다가가 잽싸게 잡아채곤 합니다. 재빠른 몸을 놀려 이리저리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뛰어다니기도 하지요. 그러다가도 덫에 걸려 죽곤 합니다. 커다란 검은 소가 있습니다. 어찌나 큰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도 같지요. 그러나 이 커다란 소는 작은 쥐 하나도 잡지 못합니다. 지금 선생께서는 커다란 나무를 가지고 계시면서도 쓸모없다고 탓하고 계십니다. 이 나무를 끝없이 드넓은 들판에 심어 두고 그 곁에서 이러지러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 아래서 여유 있게 누워도 있으면 어떨까요. 도끼질에 베어버릴 리도 없고, 아무것도 해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쓸모없다는 게 어찌 그렇게 끙끙대며 고민할 문제겠습니까."


장자의 말을 들은 혜시는 어땠을까? 무릎을 치며 좋아했을까. 아니면 '뭔 소리야?' 하며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장자를 쳐다보았을까. 모르긴 해도 혜시는 장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또 흰소리를 들었다 하며 혀를 끌끌 차지 않았을지. 


여기서 장자는 혜시가 기대하는 쓸모를 은근 비웃고 있다. 마치 살쾡이와도 같은 이들의 잔재주를 쓸모라 하는 게 아닌가. 남을 노려 해치고, 기세 등등하게 이리저리 활개 치며 다니는 사람들. 그러나 그들도 어느 순간에는 불우한 최후를 맞곤 한다. 마치 덫에 걸려 죽는 살쾡이처럼. 장자의 말을 빌리면 장자 본인은 커다란 소와 같다.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도 같다'라고 한 이 표현은 앞에서 붕새를 표현할 때 사용하기도 했다. 커다란 존재. 그러나 이 커다란 소는 쥐를 잡지 못한다. 장자가 말하는 대지大知, 커다란 깨우침이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따라서 장자는 혜시의 지적에 한편으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셈이다. 그래 아무 쓸모가 없다는 말도 맞다. 커다란 소가 작은 쥐 한 마리 잡지 못하듯, 장자의 말이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러면서도 장자는 또 다른 쓸모의 공간을 이야기한다. 커다란 나무를 가지고 있다면 이 나무를 광막지야廣莫之野, 끝없이 드넓은 들판에 심어두면 어떨까. 방황彷徨, 그 곁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하고 소요逍遙, 그 애에서 여유 있게 누워 있을 수도 있지 않나. 


<장자>의 유명한 소요유逍遙遊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장자를 읽을 때 방황과 소요가 함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본다. '소요'라는 말을 통해 장자는 자유를 노래하고 있기도 하지만, '방황'이라는 말처럼 목적 없고 방향 없는 삶도 이야기하고 있다.


방황과 소요의 삶을 이야기하는 이 나무에 주목하자. 혜시는 울퉁불퉁하고 이리저리 꼬여서 먹줄이나 자를 댈 수가 없다고 말한다. 목수가 나무를 잘라 목재로 쓰려면 반듯하게 잘라야 하는데 도무지 그럴 수 없다는 뜻이다. 규구준승規矩準繩이라는 말이 있다. 규規는 컴퍼스, 구矩는 직각자, 준準은 수평계, 승繩은 먹줄로 합리적이고 확실한 기준을 가리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혜시가 보기에 장자는 규격 외의 인물이었던 셈.


<맹자>에도 이 규구준승에 대한 표현을 읽을 수 있다.


"이루가 아무리 눈이 좋고, 공수자가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규구規矩, 컴퍼스와 직각자를 이용하지 않으면 반듯하게 원과 네모를 그릴 수 없다. 사광의 귀가 아무리 예민하더라도 육률을 이용하지 않으면 오음을 바로 잡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요임금과 순임금의 가르침이 있다 하더라도 인정仁政을 따르지 않으면 천하를 다르실 수 없다."

"규구, 컴퍼스와 직각자는 원과 네모의 표준이듯, 성인은 인륜의 표준이다."


펜을 주고 원과 네모를 그려보라고 하면 제각기 비뚤비뚤 멋대로 그려댈 것이다. 컴퍼스와 직각자가 있다면 어떨까. 반듯한 원과 네모를 그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성인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아 백성을 교화해야 천하가 바르게 될 것이라는 게 맹자의 생각이다. 맹자는 시대불문, 성인의 가르침은 변함없이 바르다고 생각했다. 맹자가 보기에는 제후들이 저마다 제 기준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게 문자였다. 제멋대로 원과 네모를 그리는 것처럼. 성인의 가르침 없이, 이상적인 통치가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맹자는 바른 기준을 세우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장자는 영 다르다. 그는 기준을 세우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는 울퉁불퉁 이지저리 꼬인 괴이한 인물이다.


맹자의 반듯함과 장자의 괴이함. 둘 모두 환영받지 못했다. 전국시대라는 혼란 속에, 맹자와 장자는 이렇게 서로 다른 편의 끝에 있어 서로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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