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장자와 맹자 #4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장자는 자신의 시대를 가시나무 길로 표현했다. 접여의 말을 통해 장자는 전국시대의 혼란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맹자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시대의 참혹함을 서술한다.
"지금 왕의 푸줏간에는 살찐 고기가 있고 마구간에는 살찐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굶주린 기색이 완연하고,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뒹굴고 있으니 이는 짐승으로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짐승이 서로 잡아먹는 것도 사람들은 꺼림칙하게 여기거늘, 왕께서는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를 그냥 볼 수 있겠습니까. 짐승으로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을 막지 못하면 백성의 부모 된 사람은 대체 어디 있는 것입니까?"
맹자는 굶어 죽은 시체가 들에 나뒹구는 시대라고 말한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일까. 일부는 철기의 보급과 함께 전국시대에 생산량이 크게 늘었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모두 배불리 먹어야 할 텐데 전혀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인류 역사를 보면 생산력의 증대가 안정적인 생활을 가져다주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산업혁명 당시 아동 노동의 참혹함은 널리 알려져 있다. 8-9세의 아동이 16시간까지 노동하는 일도 있었다. 착취, 즉 탐욕이 문제다.
맹자는 왕의 푸줏간과 마구간을 손가락질하며 묻는다. 이들이 먹는 양식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이란 말인가. 왕궁에는 백성들이 먹어야 할 것을 먹고 살찐 짐승들이 가득하다. 맹자는 이를 에둘러 말하기를 '짐승으로 사람을 잡아먹게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이 짐승을 잡아먹는 자가 또 있다. 이 짐승은 곧 고기가 되어 임금의 식탁에 오를 것이다. 백성을 잡아먹는 임금이라니!
맹자는 이 시대의 참혹함을 해결하고자 발 바쁘게 뛰어다닌 인물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하였다.
하늘이 백성을 낳으실 때 먼저 아는 자로 하여금 뒤에 아는 자를 깨우치고, 먼저 깨달은 자로 하여금 나중에 깨닫는 자를 깨우치게 하였다. 나는 하늘이 낳은 백성 가운데 먼저 깨달은 자이다. 나는 이 가르침을 가지고 백성들을 깨우치려 한다.
<맹자>에서는 이것을 고대의 재상이었던 이윤의 말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맹자 자신의 포부나 마찬가지이다. 선각자先覺者, 먼저 깨달은 자로서 백성들을 일깨우고 시대의 혼란을 바로 잡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맹자는 이윤처럼 재상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그렇다고 스스로의 처지를 불행하게 여겼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그는 재상보다 더 높은 자리를 꿈꾸었다. 관직에 얽매여 특정한 일을 하기보다 왕의 스승이 되어 참된 정치의 이상을 설파하고자 했다. <맹자>가 여러 왕들에 대한 충고와 잔소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장자>에는 이런 사명의식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참혹한 시대의 현실에 대한 고민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장자가 현실적인 한계에 주목했던 까닭이다. 장자는 개별 인간이 피할 수 없는 현실적인 한계를 이야기했다. 이때 장자가 이야기한 한계는 크게 셋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하나는 언어의 한계로,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은 늘 참된 것을 다 말할 수 없다. 또 하나는 시대의 한계이다. 그는 한 사람이 시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기대도, 인과응보와 같은 합리적인 보상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공자와의 비교를 통해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생사의 한계가 있다. 인간은 필멸의 존재로서 누구나 죽는다.
일단 사람의 형태로 태어났으니, 스스로를 해치지 말고 목숨이 다하기를 기다리자. 서로 칼을 긋고 갈아대듯 하더라도 흘러가는 것이 마치 말이 달려가는 것처럼 빠르니 도무지 막을 방법이 없으니 애닯지 않은가! 죽을 때까지 수고롭게 일하더라도 무엇인가 이루지 못하고, 지치고 고달프게 살아가더라도 돌아갈 데가 없으니 가엾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죽지 않는다 하나 무슨 이익이 있는가? 몸이 늙어가면 마음도 함께 그렇게 되니 도리어 크게 슬퍼할 일 아닐까. 사람의 삶이라는 게 정말 이렇게 허망한 것인가. 아니면 나 홀로 허망할 뿐 다른 사람들은 허망하지 않은 것일까?
삶은 안타깝고 슬프다. 여물상인상마與物相刃相靡 기행진여치其行盡如馳, 이리저리 치이고 다치며 살아가다 보면 어느새 휙 지나가버리기 때문이다. 누구도 이 삶을 붙들어 맬 수 없다. 한편 이 평생도록 수고롭게 일하고 고달프게 살지만, 이 피곤하기 지킨 몸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도 없다. 인간은 덧없이 죽음을 향해 달려갈 뿐이다.
이렇게 동시대를 살았으나 둘이 골몰하는 문제는 서로 달랐다. 맹자가 시대의 아픔에 공명하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장자는 시대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필멸의 존재로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다. 선각자로서 시대의 광명을 일깨우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 맹자라면, 장자는 시대적 실존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있다. 혼란한 시대를 맞아 무엇을 할 것인가? 맹자는 '인의'라는 가치를 붙잡고 시대의 변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혼란한 시대임에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도리어 절실한 질문이 닥친다. 죽음으로 달려가는 삶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