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장자와 맹자 #5
* 용산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장자를 만나는 네 가지 길'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맹자는 오직 인의만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선각자로서 커다란 사명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자각하였다. 이런 까닭에 <맹자>는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장자는 차가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생사의 경계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삶과 죽음에 대해 묻는다.
삶을 기뻐하는 것이 어리석게 아닌지 내 어찌 알겠는가.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어려서 고향을 떠나 길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지 내 어찌 알겠는가.
여희는 애라는 곳의 국경지기 딸이었다고 한다. 진晉나라 임금이 여희를 데려갔을 때 옷깃을 적시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군. 그러나 왕궁에 이르러 왕의 침소에서 맛난 음식을 먹으면서 서럽고 슬프게 울던 때를 후회했다지. 저 죽은 자들도 처음 살겠다고 애쓰던 때를 후회하지 않을지 내 어찌 알겠는가
생사의 경계에 이르면 통상적인 가치들이 재점검되기 마련이다. 이 절대적인 도전 앞에서는 모든 문제가 별것 아닌 것이 되어버리곤 한다. 게다가 죽음이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이렇게 말한다. '내 어찌 알겠는가?' 죽은은 질문으로만 다룰 수밖에 없다. 그 알 수 없는 세계에 들어가도 지금 우리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할까?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죽음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고 이야기한다. 살아서 덕을 쌓아야 건강한 죽음을 맞으며, 나아가 사후 세계에서도 높은 덕을 가진 영웅들과 교류할 수 있다. 설사 망각의 강, 레테를 건너 새로운 삶으로 태어나더라도 그 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지혜를 추구하는 것은, 덕을 쌓는 것은 살아서도 복이요, 죽어서도 복이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먼 훗날의 삶을 위해서도 복이다.
그러나 장자는 불신이 많은 인물이다. 그는 이렇게 질문을 던질 뿐이다.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살아있는 자들은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데, 죽은 자들도 그럴까? 죽어보지도 않은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죽은 자들도 죽음을 안타까워할까? 도리어 살아있는 자들이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죽은 자들은 살아있을 때를 안타까워하지 않을까?
<장자> <지락> 편에서는 해골과 장자의 대화를 싣고 있다. 장자가 어느 해골을 만나 다시 살게 해 주겠다고 말한다. 그러자 해골은 손사래 치며 거절한다. 어찌 이 즐거움을 버리고 다른 괴로움을 겪겠느냐고 반문한다. 장자는 이 우화를 통해 삶의 즐거움과 죽음의 고통이라는 도식을 무너뜨리고, 죽음의 즐거움과 삶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죽음이야말로 삶의 문제가 일소되는 기꺼운 사건이다.
문득 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죽음을 긍정했다면 장자는 자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죽음을 미화(?)했던 것처럼 자살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장자는 죽음이란 인간의 권한 바깥에 있는 것이라는 강조 했다. 생사는 서로 맞닿아 포개져 있는 것일 뿐이다.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는 것이지 죽음만 따로 있는 건 아니다. 그렇기에 장자는 죽음을 긍정하고 돌아와 다시 삶을 긍정한다. 죽음을 피하며 살기만을 추구하는 삶이 어리석은 것처럼, 죽음을 추구하며 살기를 포기하는 삶도 어리석다.
한편 장자가 생사의 경계를 명확히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짚어두어야겠다. 삶에는 죽음이 따라오기 마련이듯, 죽음은 삶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무엇으로 삶과 죽음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까. 유명한 꿈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장자는 꿈을 빚대어 세계를 이쪽과 저쪽으로 명확하게 가를 수 있는지 묻는다.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면, 꿈속에 또 꿈을 꾸는지도 모르는 것이라면, 꿈속에서 꿈을 꾸기도 하고 꿈속에서 꿈에서 깨기도 한다면 어떤가. 삶이 꿈일까 아니면 죽음이 꿈일까?
안타깝게도 장자는 명확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장자는 질문을 던질 뿐이다. 장자는 이 질문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명한 답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묻는다. 따라서 생사의 문제로 다시 돌아오면 그는 죽음을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삶이 즐겁고 죽음이 슬프다는 보편적인 생각에 딴죽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장자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말의 비아냥을 받아들인다. 이쪽의 진실은 저쪽의 거짓이며, 저쪽의 진실이 이쪽의 거짓이 되곤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접근을 맹자가 좋아할 리 없다. 맹자도 생사의 문제를 이야기하는데, 역시다 그는 단호하다. 삶은 좋은 것이고 죽음은 싫은 것이라는 건 맹자에게 당연한 진실이다. 그러나 맹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생선 요리도 내가 좋아하고 곰 발바닥 요리도 내가 좋아한다. 그러나 둘 모두 먹을 수 없다면 생선 요리 대신 곰 발바닥 요리를 택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도 내가 원하는 것이고 의로움도 내가 원하는 것이다.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택하겠다. 삶도 내가 바라는 것이기는 하지만, 삶보다 더 바라는 것이 있으므로 구차하게 살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도 내가 싫어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죽음보다 더 싫어하는 것이 있으므로 피하지 않고 순수히 죽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사생취의舍生取義, 즉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한다는 말이 나왔다. 맹자에게 인의란 자신의 생명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살아서 의로움을 추구할 수도 있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있다는 게 문제다. 명백한 불의를 보고 어떻게 히야 할 것인가. 의로움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순간을 맞는다면? 맹자는 사생취의,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올은 <맹자, 살마의 길>이라는 책에서 '조선왕조는 맹자로 건설되었고 맹자로 유지되었다'고 말한다. 고려라는 낡은 국가를 무너뜨린 혁명의 정신이, 권력에 맞서 대항하는 선비들의 꼿꼿함이 <맹자>로부터 나왔다는 말이다. 그의 말처럼 <맹자>는 의사義士와 지사志士를 낳는 책이다. 공자의 <논어>는 어떨까? 흥미롭게도 <논어>에는 맹자가 말하는 것과 같은 이런 정신이 별로 없다. 일찍이 공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다스려지는 나라에서 관직에 나아가고, 어지러운 나라에서는 물러나라'고.
용산 남산 도서관 옆에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다. 입구 한쪽 벽에는 그가 뤼순감옥에서 썼다는 글들이 새겨져 있다. 많은 글이 유가 경전에서 나온 것이다. 여기서 그의 강인한 절개를 볼 수 있다. 글의 힘은 생가보다 커서 어떤 글을 읽고 쓰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지곤 한다. 이런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었기에 오늘날에도 그를 기억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장자>는 어떨까? <장자>를 읽으면 과연 어떤 삶을 살게 될까?